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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라 Jul 20. 2023

용서는 나의 힘

10년이 넘는 가정폭력의 상처를 잊은 나만의 치트키


셋째가 결혼한다. 온종일 요구르트만 먹어서 맨날 혼나던 사과머리를 한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어엿한 숙녀가 된 건지. 우리 셋째 이름은 김 씨다. 나는 정씨다. 성이 다르지만 셋째는 내 친동생이다. 우리는 같은 엄마의 배에서 잉태 당했다. 우리가 원하던 일은 아니지만, 우리 둘은 꽤 잘 맞는다. 결혼을 앞두고 대판 싸우기도 했지만 서로 그만큼 마음이 크고 의지도 많이 한다. 여느 자매처럼 다르지만 같게 생겼다. 성격도 그렇다. 나는 이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노란 옷을입은 것이 나, 분홍옷을 입은 아이가 셋째다.

나에겐 친아빠와 아빠가 있다. 양선씨는 양선씨일지언정 새아빠였던 적이 없다. (양선씨는 실제 내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이며 그의 면전에서 부르는 애칭이기도 하다)


셋째는 양선 씨의 자녀다. 그래서 성이 다르다. 엄마가 재혼했을 당시에는 호주제라는 것이 있었다. 엄마와 양선 씨가 결혼하고 내가 그를 아빠라 불러도 등본을 뽑으면 동거인으로 나왔다. 새엄마가 재빠르게 나와 원수 같은 엄마 아들놈을 바로 자신의 친자식으로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친아빠는 양육비를 한 번도 보내준 적이 없었다.


양선 씨는 주7일 술을 먹었고 주3~4회 정도 술을 먹고 들어와 난동을 피웠으며 엄마와 우리를 때리기도 했지만, 우리를 키웠다. 술을 먹고 엄마를 때리고 눈을 흘기면서도 우리에게 라면을 끓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식에 그의 손을 잡고 식장에 입장했다.


내가 식장에 양선씨의 손을 잡고 들어가겠다고 선언했을 때의 심정은 아마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도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다만 10년의 결혼생활을 하며 이어져 온 행복했던 명절과 아빠와의 추억들을 생각하면, 또 다가오는 셋째의 결혼식을 생각하면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고 확신한다.


내가 결혼할 당시 엄마는 두 번째 돌싱이었다. 엄마는 첫 번째 이혼 직후 바로 셋째를 가졌기 때문에 돌싱라이프를 즐겨본 적 없었다. 양선씨와 이혼하고 나서야 엄마는 지금까지 돌싱으로 살고있다. 그렇게 좋은 엄마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는 두번째 이혼 후 중학생이던 셋째와 유치원생 막내를 데리고 암 투병을 하며 살았다.


두번째 이혼이라는 딱지가 두려웠을텐데도 용기를 낸 엄마를 이해한다. 한때는 친아빠보다 좋았던 아저씨는 어느샌가 온 가족의 공포대상이 되어선 아빠를 떠나야만 온 가족이 살 수 있었다. 실제로 우리 사남매와 엄마는 아빠를 떠나고나서야 십여 년 만의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10년 넘게 엄마에게 집착하며 매일 밤 술을 먹고 온 집안을 부쉈던 아빠와의 이혼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아빠의 주폭은 여타 가해자들에 비해서도 심각한 수준이었고 엄마의 심리상태 또한 아주 어려웠다. 이 이야기는 엄마가 아빠를 피해 당시 생명의 전화였던 1366에서 연계되어 엄마가 셋째, 막내와 피신하고 정착하게 된 가정폭력보호센터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갈 곳이 없던 23살의 나도 그곳에서 반년 정도를 기거했다.


아빠는 엄마가 떠나고 나서도 엄마와의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매일 술 먹고 때리거나 행패를 부렸으면서도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와 아빠의 지지부진한 이혼소송이 끝나고 나서도 아빠는 엄마의 살 집을 구해주기도 하고 우리와 만나 밥을 먹기도 했다.


이혼소송 중 아빠가 월세를 제대로 내지 않아 엄마가 살던 집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일 처리가 빠른 엄마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보증금보다 더 많이 밀린 월세를 깎고 깎았고 싸게 짐을 빼둘 곳을 찾았다. 이사는 나 혼자 진행했다. 아빠가 엄마를 만난다면 맨정신에라도 큰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어렸을 적엔 아빠를 무척 사랑했지만, 크면서 그에겐 미움과 분노가 컸다. 하지만 어렸던 나를 사랑해주었던 그의 마음 하나에 의지해서 살았다. 그래서였을까 집을 비우던 날 엉망이 된 집을 보면서 그에 대한 분노보단 슬픔과 연민이 먼저 쌓였다.


늘어져 있던 술병과 장판에 다 눌어붙은 담배들. 곰팡이가 슬어 잔뜩 상한 냉장고 속 음식들과 쌓여있는 컵라면, 설거지들. 아마 술에 취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들어왔는지 여기저기 난무했던 신발 자국들. 그가 우리에게 행한 폭력의 세월에도 울컥 눈물이 났다. 순수하게 그가 불쌍하기도 했고 이 상황을 혼자 처리해야 하는 고작 23살의 내가 처연하기도 했다. 그의 절망을 삼키기엔 좀 어린 나이이지 않나.


아주 고약하고 성질머리가 있었던 집주인 대신 좀 유한 그의 남동생이 찾아왔다.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는 엄마가 아닌 어린 내가 정리하러 온 것을 보고 많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다행히 최근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그는 그런 내가 측은했는지 도배와 장판에 관해 묻지 않았다.


이삿짐을 나르러 오셨던 분들은 아주 쾌활한 분들이었다. 일 처리가 빠르고 신속했다. 애기가 볼만 한 집이 아니니 우리 믿고 잠깐 나가 있으라고 하셨지만 20대였던 나는 내가 애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짐을 꼼꼼히 챙기기 위해 이것저것 부탁했다. 전날 아빠가 게워냈던 것들을 청소하고 설거지도 했다. 어린아이 손이 아주 야무지다며 힘든 일을 겪었으니 앞으로 잘 살 것이라고 얘기 해주셨다. 덕분에 음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밝아졌지만 그렇다고 절망이 사라지진 않았다.


이게 나의 삶이다. 앞으로 좋아지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이게 나의 삶이다. 내가 밟고 일어서야 할 삶이다. 아빠가 밉지도 엄마가 밉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할 힘이 없었다. 엄마와 엄마의 이혼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지만 아빠는 내가 선택한 거였으니까.


초등학교 2학년 현장체험 학습으로 민속촌을 갔었다. 그때 친아빠가 찾아왔다. 나를 보러 학교를 찾아왔는데 그날이 소풍날이라고 해서 소풍 간 곳을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했다. 엄마가 준 돈으로 김밥천국에서 산 김밥을 까먹으며 아이들과 떨어져 친아빠와 단둘이 대화를 했다.


친아빠는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지갑에 가득한 현금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빠 미안하지만, 나에겐 지금 엄마가 더 필요해요. 아빠랑 살 수 없어요.” 멋지게 양복을 입고 빛나는 새 구두를 신었던 친아빠의 얼굴에 서린 슬픔을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알았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는 몰랐을 테지만 어렸을 때부터 여러 번 그에게 버림받은 나였기에. 빚쟁이가 집에 쫓아와 우릴 괴롭혀도 혼자 몸을 숨겼고 엄마 몰래 가르쳐준 번호로 전화해도 화만 내며 한 번도 우리를 보러 찾아오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그런 그에게 신뢰감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양선씨를 선택했다.


엄마와 친아빠가 이혼 조정을 하기 전부터 친아빠는 없는 존재였다. 엄마가 되어 보니 그 나이에 우리가 얼마나 친아빠를 찾았을지 엄마가 혼자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해야 했을지 뼈저리게 느껴진다. 양선씨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던 엄마가 처음엔 미스인줄 알았고 우리가 있는 줄 알고선 마음을 접었다가 이혼한 것을 알고선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양선씨의 사업은 수없이 망했지만 그는 전략가였다. 우리를 잘 공략했다. 사람 좋은 건 지금도 인정한다. 우리가 그에게 겪은 수많은 폭력의 나날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린 나의 기억엔 몇 번이고 네발을 기며 말을 태워주고 무등을 태워줬던 그의 등이 따뜻했던 나날들이 있다. 함께 바다와 수산시장에 가고 낚시를 가고 놀이동산엘 갔다. 그 몇 년간의 기억으로 나는 지금도 그를 사랑한다.


그래서일까 내 마음속엔 그를 위한 수많은 변명이 있다. 총각이었던 그가 우리를 기르기가 쉬웠을까? 딸 부잣집에서 독자로 태어났다가 연이어 태어난 남동생 때문에 독자로 살지 못했던 맏아들. 까막눈이어서 문서정리를 못 해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었지만 억척스럽게 7남매를 키워낸 자신의 엄마를 사랑했던 사람. 그런 할머니의 반대에도 우리를 들이고 필연적으로 이간질과 시집살이를 중간에서 견뎌내야 했던 아빠. 잘 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던 수많은 실패. 무엇보다 부잣집 아들에 우리의 진짜 아빠였던 전남편이라는 허상과의 싸움. 그 당시에는 많은 것들이 어린 그에게 너무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처음 온 집안을 부시며 엄마와 싸우던 새벽. 할머니와 갓 태어난 셋째. 그 당시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엄마 아들놈까지 모두가 숨죽였던 그 날 밤. 어린 나는 침묵을 깨고 뛰어나가 아빠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아빠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하지만 아빠의 주폭이 심해지고 엄마를 향한 구타가 심해질수록 나는 나설 수가 없었다. 나와 동생은 이불 속에서 눈을 마주치며 떨었다. 그 죄책감과 무력감이란.


엄마가 자궁암 진단으로 병원을 오가던 중학생 시절. 시험이 끝나고 일찍 집으로 와 동생과 컴퓨터를 가지고 실랑이하던 낮에 시뻘건 눈을 한 아빠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우리가 보고 있던 컴퓨터와 티비를 내던져 박살 내며 엄마를 찾았다. 곧이어 유치원생이었던 셋째가 아무것도 모르고 집에 들어왔다. 노란색 원복에 하얀 스타킹을 신었던 셋째의 눈에 서렸던 두려움. 그 둘을 내 뒤로 숨긴 채 아빠가 진정되길 기다렸지만 그의 언성은 낮아지질 않았다.


결국 그는 칼을 뽑아 들었다. 정육점을 했던 아빠는 소와 돼지를 손질하는 기술자였다. 그의 칼은 늘 아주 예리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내 뒤에서 오들오들 떨던 두 아이의 온기는 기억이 난다. 무슨 용기인지 내가 죽더라도 아빠를 막고 아이들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다치게 할 수 없었고 또 아빠를 살인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예전부터 신기하게 나는 건드리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속 깊이 아빠는 선하다고 믿었기에 그 믿음이 깨지는 걸 무의식중에도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티비 파편이 무릎에 박혀 피가 나고 따가웠고 팔이 저렸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곧이어 엄마가 들어왔다. 아빠는 바로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들어왔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들고 있던 칼로 엄마의 목에 생채기를 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큰일이 생기면 무섭도록 차분해진다. 무릎 꿇고 있던 내가 일어섰고 아빠가 주춤했다. 그 사이에 엄마가 아빠에게서 도망쳐 내 등 뒤에 있던 동생들을 안았다. 울음소리가 컸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무척이나 고요했고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다시 엄마를 잡으려 하자 아빠를 밀치고 다시 그 셋을 등 뒤에 두고 아빠를 막아섰다. 아빠는 몇 번이나 엄마에게 칼을 휘둘렀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두려웠던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내가 두려워했다면 아빠는 나를 밀쳐냈을 것이다. 몇 번 시도 하던 아빠는 소파에서 한참을 울다가 다 같이 죽자며 가스레인지로 향했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라이터를 꺼냈다.


그 순간에 엄마가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도망쳤다. 나와 아이들이 집에 남았지만 상황을 알고 말리러 온 생선가게 아저씨의 만류에 아빠는 정신을 차린 것인지 포기한 것인지 주저앉았다. 나와 동생들은 그때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엄마와 우리는 경찰서로 향했다. 그들은 엄마의 목에 선명한 칼자국과 오들오들 떨고 있는 우리를 보면서도 심드렁했다. 나는 지금도 경찰들을 경멸한다. 물론 그들과 다른 사람이고 같은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 아님을 살면서 여러 번 경험했지만, 그때 그들의 눈에 서렸던 무관심과 우리를 향한 경멸? 더러움?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이런 일은 자기들도 손을 댈 수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그 사람이 있던 집으로.


결국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엄마는 무슨 용기였을까.


제정신이 돌아온 아빠는 우리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빠의 엄마인 할머니는 없던 일로 치라고 했다. 그녀는 현장에 없었다. 제 아들이 감옥에 들어갈까 걱정이 컸다. 지금은 그것을 이해하지만 중학생인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녀의 반응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한 번의 이혼을 겪은 엄마는 또 이혼할 수가 없어 그날 일을 넘겼다.


아빠의 주폭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이 그의 행동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이었다. 또 방임과 학대였다.


나는 밤마다 가스레인지 앞을 지켰다. 부엌에 이부자리를 펴고 베게 밑엔 집에 있는 칼과 가위를 숨겨두었다. 아빠가 술에 취해 들어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잠들 때까지 눈싸움을 해야 했다. 당시 뉴스엔 온 가족이 가스를 끊어 불을 내거나 자살하는 일이 자주 보도됐다. 그 뉴스의 주인공이 되긴 싫었다.


그래도 우린 여전히 가끔 좋았다. 삼겹살을 구워서 서로 입에 넣어주기도 하고 놀러 가기도 했다. 엄마 아빠 몰래 예고 시험을 접수하고 실기시험 당일이 되었을 땐 포기하고 울고 있던 나를 아빠가 얼러 오토바이로 시험장에 데려다주어서 겨우 시험을 칠 수 있었다. 시험에 떨어져서 절망했을 땐 술 먹고 256색 크레파스를 사다주기도 했다. 예중이 아니라 예고 시험에 떨어진 16살에 선물 받은 크레파스란. 쓰레기도 못 되는 것이었지만 그는 나에게 마음을 썼다. 그게 보통 아이들이 아빠에게 받는 사랑에 비해 많이 부족할지 몰라도 나에겐 충분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대학등록금을 핑계로 나와 동생은 친아빠에게 갔다. 아빠는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우릴 보내주었다. 그 이후로 엄마가 아빠에게 대항하는 일이 많아졌었다고 한다.


하긴 그 시절 힘들면 우리를 보육원에 보내거나 아빠에게 양육권을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끝까지 우릴 지켰던 엄마. 솔직히 엄마도 우리에게 여러 가지 폭력 같은 실언에 학대 같은 방임을 했다. 양선씨와 양선씨 엄마 게다가 다섯 시누이의 눈치를 보며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만큼 많은 것을 해주지도 못했다. 그래도 우릴 향한 마음만은 컸던 엄마에게 나와 동생이 없다는 건 정말 큰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집을 나왔을 때 셋째는 초등학생이었다. 가정폭력보호센터에서 중학교에 들어갔다. 입소 기간이 지나 아빠가 마련해준 집에 들어갔을 때 우린 같은 방을 썼다. 스무 살이었던 나는 셋째에게 매니큐어를 발라주거나 어쭙잖은 화장을 해주었다. 앞머리를 잘라주기도 했다. 돈도 잘 못 버는 언니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차라리 돈을 좀 벌어서 용돈을 쥐여주고 필요한 건 사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쩌면 셋째는 나보다 힘든 사춘기를 보냈을 것이다. 나의 양선 씨와 셋째의 아빠는 다를 수밖에.


그래서 내가 결혼식을 하며 아빠를 부른다고 했을 때 무엇보다 싫어했던 건 고등학생이었던 셋째였다. 하지만 내가 아빠의 손을 잡고 들어갔던 건 무엇보다 셋째의 탓이 컸다. 셋째가 아빠와 화해하고 나보다 온전한 결혼식을 치르길 바랐다. 그리고 그 결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술을 먹지 않겠다던 아빠는 여전히 술을 먹는다. 나와 전화를 하며 수다인지 술주정인지 모를 대화들을 쏟아낸다. 가끔 찾아올 때는 좋은 아빠이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충분히 좋은 사람이다. 엄마와 나, 희성이에게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옛날얘기를 꺼내면 죄인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에겐 ‘너희에게 미안한 것 따윈 없다’라는 친아빠도 있는걸. 그런 사이코패스만 아니라면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하는 그를 용서하지 못할 것도 없다.


불쑥불쑥 불행했던 유년 시절이 떠오르고 그가 미워지기도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그를 아빠로 인정하고 용서했다. 그리고 그에게 기회를 준 내가 자랑스럽다. 그는 잘 해낼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부족하더라도 자신만의 모양으로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역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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