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말이 느린 이유
어릴 때부터 말이 빨랐고 책읽는 것을 좋아하고 또래보다 어휘수준이 높은 점순이에 비해 꽁꿀이는 세 돌이 지나서야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을 정도로 말이 느렸고 여섯 살인 지금도 느린 편이다. 점순이가 네 살 때 듣던 마더구스 영어노래를 요즘에야 관심을 갖고 듣기 시작했는데 흥얼흥얼... 다 틀리는 발음으로 어린이집에 가서도 춤을 추며 혼자 부른단다.
꽁꿀이 현재 담임선생님은 작년에는 점순이반 담임선생님이었기에 점꽁자매를 차례로 이 년 가까이 맡아주고 있다. 오늘 하원길에 내가 '꽁꿀이는 뭐든 느리더라고요. 점순이만 키울 땐 제가 잘 키워서 똑똑한 줄 알았는데 꽁꿀이까지 낳아 키우니 그냥 책을 좋아하는 아이의 성향과 어린이집 독서가 합쳐져서 언어능력이 좋다는 걸 알았답니다.' 라고 운을 띄웠다.
" 오늘 아침에 아빠가 데려다주실 때 보니 아버님 눈에서 꽁꿀이 바라볼 때 꿀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알았죠. 아 집에서 이렇게나 사랑받고 크는구나 하고..."
문제는 늘 그렇다보니 둘째에게는 뭘 특별히 잘했으면 하는 기대가 줄고 그냥 건강하기만을 바라고 첫째를 키울 때보다 허용치가 느슨해진다는 것이다.
일곱살이 되었지만 자기이름만 읽을 줄 아는 꽁꿀이가 (점순이는 5세에 스스로 글자를 다 읽고 6세 봄에 쓰기를 했다) 요새 언니가 책을 읽으면 옆에 앉아 책을 본다. 예전에는 거꾸로 놓고 봤는데 요샌 그래도 글자는 바로 보는데 대신 제일 뒷페이지부터 본다 하하.
그러다가 가끔 아이가 사진이나 그림을 보고 혼자 방언을 하는 걸 보면 문득 아이는 어른의 말로 설명하지 못할 뿐 무엇보다 자신의 세계 속에서 잘 표현하고 사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글자를 모르다보니 그림책도 내용보다 색감에 민감하고 내용을 모르지만 지난번 그림책에 나온 똑같은 등장인물을 금새 찾는다. 진실은 언제나 저 멀리 있지만 그 진실에 닿는 유일한 길은 언어라고 생각했는데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서문에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아이의 세계에서는 규정짓는 언어가 없어도 진실은 늘 같은 자리에 있다.
그림책을 읽을 때도 음독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림을 통해 상상하게 되니 상삼력과 창의력이 더 풍부해질 것이고 결국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길어질거라 생각하니 또 다시 꽁꿀이가 부러워졌다. 어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아이는 열심히 보고 찾고 추구하고 있겠구나 싶어서 그 세계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4차 산업혁명시대가 왔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은 아직도 획일적이고 경쟁 위주이다보니 창의력 있는 인재를 배출해내기가 힘들다. 대부분의 성인들도 어릴 적에는 지금처럼 틀에 박힌 사고만 하지 않고 아이 답게 순수하고 독창적인 상상을 하며 자랐을 텐데 크면서 '그런 쓸모 없는 (더 정확하게는 성과를 낼 수 없는) 상상 따위 하지 마' 라는 말을 듣고 그나마 남아있던 창의성도 소멸되고 만다.
우리 둘째는 틀에 맞추어서 보면 이해하기 힘들고 엉뚱하고 학습속도가 느리고 고집이 센 아이라 표준화된 교육에 적응할까 걱정될 때가 종종 있다. 사회적 규칙을 제대로 안 지킨다면 그건 부모가 훈육을 해야겠지만 단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아이를 다그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르다는 건 좋은 거니까, 단점이기보다는 장점이니까, 그렇게 남들과 다르게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표현하고 상상하며 순수하게 오랫동안 행복할 아이를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