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바보나무'라고 불리는 벚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전공수업도 겨우 찾아가서 듣던 20살의 3월, 기숙사 룸메이트 언니는 내게 "우리학교에 바보나무있는 거 알아?"라며 바보나무의 존재를 처음 알려줬다. "바보나무요? 나무 이름이 바보예요? 왜요?"라고 묻자 "벚꽃이 가장 빨리 피거든"이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얼마나 빨리 벚꽃이 피길래 저런 멸칭이 전캠퍼스적으로 붙었을까 궁금해졌다.
3월 말이 되었을 때쯤 언니가 해줬던 말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제 막 꽃봉오리를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체육관 앞 바보나무에 만개한 분홍색의 벚꽃이 주렁주렁 달렸다. 캠퍼스에 찾아온 이른 봄이었다. 그 설렘을 목도한 사람들은 바보라고 실컷 놀린 미안함따위는 다 잊고 사진을 남기기 위해 바보나무 앞에 길게 줄을 섰다. 물론 나도 양심이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사진을 찍기 위한 줄을 기다리면서 친구들에게는 바보나무 별명의 유래를 퍼트리기 여념이 없었다.
4월이 되자 드리운 벚꽃 그림자에 캠퍼스의 모든 발자국이 잡아먹혔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봄의 향연이 펼쳐졌다. 모든 단과대 앞마다 벚꽃시즌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였고 아무도 이미 꽃잎이 혼자 다 져버린 바보벚꽃을 언급하지 않았다. 혼자 무성한 초록빛으로 변한 나무는 또 누구보다 빨리 열매를 맺을 준비를 시작했다. 주변의 시선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갈길만 가는 것이 딱 바보나무스러웠다.
몇번의 봄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 왔다. 이제는 길거리에 가득한 벚꽃들을 올려다보며 가끔 지금의 내가 그때의 바보나무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누구보다 빨리 만개한 모습이 아니라, 누구와도 다른 모습이 말이다. 학생에서 힘들게 사회인이 된 나는 6개월 전 퇴사를 선택했다. 누군가는 이 시국에 회사를 그만두는 내가 무모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용기 있다며 박수를 보내줬다. 이러나 저러나 월급받는 삶을 유예하고 제멋대로 살며 남과 일체화되지 못하는 것이 딱 바보나무 모습 그 자체다.
20살의 나는 바보벚꽃을 보고 '꼭 저렇게 튀어야해?'라며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남과 다른 건 틀린건 줄 알았기네 무던히도 남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애썼다. 입고 싶은 옷이 있어도 튀지 않기 위해 가장 유행하는 스타일을 고집했다. 지금은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라 그냥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애써서 다 같아질 필요가 있을까? 우리 그냥 각자의 박자대로 살자. 엇박이든 정박이든 각자가 만들어낸 박자가 새로운 조화를 이룬다면 우리의 삶은 그렇게 더 다채로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