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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밤 Jul 05. 2023

천국으로 가는 2,830개의 계단

그라우스 그라인드 트레일 등반



I SURVIVED THE GRIND

뜨거운 바람이 아직 남아있는 9월, 갑자기 아이들이 그라우스 그라인드를 오르자고 졸라댔다. 그라우스 그라인드는 2,83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2.5킬로미터의 하이킹 트레일이다. 한 번 올라가면 중간에 내려올 수 없어 ‘천국으로 가는 계단’으로 불린다.


이렇게 힘든 곳을 갑자기 왜 가고 싶냐고 묻자, 가족과 함께 매년 시간단축에 도전하는 친구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맘때 빨리 올라가기 대회를 하는데 현재까지 가장 빠른 기록이 25분이라며 도전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건장한 체격의 성인이 오르면 1시간 반, 아이들이 가는 경우 쉬면서 가면 2-3시간 걸린다는 글을 찾아보고 덜컥 겁이 났다. 평소 운동이라곤 해본 적 없는 내 체력이 견딜 수 있을까? 혹시라도 아이들이 중간에 못하겠다고 포기하면 내려갈 수도 없다는데 어떡해야 할까?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의지는 확고했다.


이른 아침, 김밥에 과일, 커다란 물을 담은 배낭을 메고 우리는 그라우스 그라인드로 향했다.




트레일 입구에서 아이들과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끝도 없이 이어져있는 계단을 보자 숨이 턱, 막혀왔다.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함께 걸어가던 둘째와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 돌계단 너머로 첫째 아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엄마, 4분의 1 지점이야! 여기 싸인이 있어!”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정도가 흘러 있었다. 아직도 겨우 4분의 1이라니… 막막함이 밀려왔다. 더구나 표지판에는 지금까지는 평이한 코스였으며 앞으로는 더욱 오르기 어려워질 거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역시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내려갈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좁은 계단으로 사람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을 뚫고 내려가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앞만 보고 가는 수밖에!


오르기 어려워질 거라는 싸인과 달리
몸은 점점 계단에 익숙해져 갔다


묵묵히 계단을 올랐다. 주저앉을 수도, 다시 내려갈 수도 없는 이 길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향하는 것뿐이다. 어느새 산 중턱에 다다랐고, 밴쿠버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열심히 걸어 올라갔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했던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자 아이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4분의 2 지점이다! 벌써 반을 왔어!!!”


반을 왔다고? 이상했다. 분명 길이 어려워질 거라고 했는데 내 몸은 이전보다 가벼웠다.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버틸만했고, 처음 4분의 1 지점에 도착했을 때보다 몸도 뻐근하지 않았다. 아이들도 나와 비슷했는지 이전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조금이라도 기록을 단축해야 한다며 두 계단씩 성큼성큼 올랐다. 어느새 우리 목표는 가느냐, 마느냐가 아닌 시간을 얼마라도 더 줄일 수 있는가로 바뀌어 있었다.


새로운 목표를 떠올리며 열심히 계단을 올랐다. 가파른 경사 때문에 뒤를 돌아볼 새도 없었다. 그리고 4분의 3 지점 도착. 사람들을 잔뜩 실은 곤돌라가 쓰윽 지나갔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아이들은 달리기 시작했고 나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손을 뻗으면 정상에 다다를 것만 같았다.


2시간 33분 27초. 해냈다.

우리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날밤, 지독한 몸살을 겪었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경련과 온몸을 두들기는듯한 통증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정신은 또렷했다.


어떤 일이든 처음이 가장 어렵고,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새로운 고비를 만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 임계점에 도달하면 어느새 목표한 바에 다다른다.


계단을 오르려면 일단은 땅바닥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발을 떼야한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이것이 목표를 향해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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