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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 Jan 25. 2023

희귀 혈액암 진단

정신 승리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세침술 결과가 드디어 나온 것이다.  


“혈액암입니다. 다발성골수종으로 의심됩니다. “


다시 입원해서 추가 검사를 한 뒤 치료 방향을 결정하겠다고 했다. 예상 못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혈액암이라는 한 단어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되어 가슴을 짓이겼다.


남편의 골반뼈와 허벅지에 자리 잡고 있는 상세불명의 악성신생물... 그 원흉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남편의 직업이 자랑스러웠다. 우리가 만나기  시어머니께서 쓰러지셔서 119 구급대를 부른 적이 있다고 들었다. 소방 구급대원의 신속한 조치로 어머님은  화를 면하실  있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했을  걱정이 앞섰던 것은 사실이나 열의에  눈빛과 뚜렷한 동기에 반기를  수는 없었다. 그는 나에게 1년만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독서실에 처박혀 공부만 했고 정확히 1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벌써 13 차의 베테랑 소방관이다.


남편의 근무패턴은 일반 직장인과는 많이 달랐다. 일주일은 여느 직장인처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했지만, 그 후 2주 동안은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무려 15시간을 근무했다. 즉, 3주 중 2주는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해야 했는데 야간근무 주간 동안 남편은 일반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나와 이틀에 한 번만 함께 먹고 잘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밤낮이 계속 바뀌는 이 근무체계가 예전부터 잘 이해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도 건강한 패턴은 아니다.  


다발성골수종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으나 고령, 유전적 원인, 면역억제, 방사선 노출, 벤젠 및 유기용제, 제초제 등이 위험인자로 알려져 있다. 남편은 젊다. 그의 쌍둥이 동생이 건강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유전적 원인도 제외할 수 있을 것이다.


소방관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부러 바쁜 서를 찾아다닌 남편이었다. 용감하게 불타는 건물에 뛰어들어 생명을 구하고 표창도 받은 그다. 화재 현장에서는 벤젠, 포름알데히드와 같은 각종 발암물질이 발생한다. 남편이 화재를 진압한 날은 여기저기 숱검덩이 묻어있었고 세수를 하면 한참 동안 코와 입에서 시커먼 이물질이 흘러나왔다. 자랑스러워했던 남편의 그 숭고한 직업이 남편을 아프게 한 건 아닐까?


혈액암을 비롯해 혈관육종, 림프종, 구강암, 편도암 등의 암은 유해물질로 인해 발병률이 증가하는 암으로 구분되고 일반인들에게는 쉽게 발병하지 않는다고 한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국가 암 통계에 따르면 일반국민들과 달리 소방관들에게서 특히 혈액암, 혈관육종, 림프종, 골육종, 구강암 등의 희귀 암이 많이 발병한다. 소방관들이 높은 확률로 혈액암에 걸리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다시 긴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제 신경과가 아닌 혈액종양내과의 환자인 남편은 일반 병동이 아닌 암병동의 병실을 배정받았다. 암병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는 무게감만큼, 병실의 분위기부터 일반 병동과는 사뭇 달랐다. 병실의 공기부터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환자들의 얼굴에서는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가족이 아닌 간병인의 돌봄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다발성골수종은 50대 이상에서 호발 하는 병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노인이었다. 삭막한 병동에서 남편과 서로 의지할만한 말벗이 생기길 바랐지만, 병실의 다른 환자들은 모두 커튼을 치고 생활했고 그들 간에 오가는 대화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좋은 면만 보기로 했다. 적어도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애먼 시간만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편의 마비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다. 여러 가지 검사가 진행되었고 남편은 그 힘들다는 골수검사도 힘든 내색 없이 잘 받아주었다.


“다발성골수종이라고 하셨죠? 혹시 포엠스 증후군일 가능성은 없나요?”


“포엠스 증후군을 아세요?”


주치의로 배정된 젊은 레지던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주치의와 확인한 결과 남편의 병은 다발성골수종의 아형, 포엠스 증후군이었다. 혈액암에 대해 검색하면서 남편의 증상이 포엠스 증후군 환자들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이 병에 대해 연구한 다수의 논문을 찾아 읽었었다.


혈액암이라는 얘기를 듣고 제일 먼저 찾아본 것은 상대 생존율이었다. 혈액암은 고형암과 달리, "몇 기"라는 개념이 없다. 혈액암은 크게 백혈병, 악성림프종, 다발성 골수종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다발성골수종은 자주 재발해 치료가 까다롭고 생존율도 낮다.


1993~2015년 기준 다발골수종의 5년 상대 생존율은 약 33%, 10년 상대생존율은 약 19%였다. 위암의 5년 상대생존율이 약 62%, 10년 상대생존율이 약 59%인 것과 비교해 보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이다. 포엠스 증후군은 희귀병으로 정보를 찾기가 힘들지만, 많은 검색을 통해 다발성골수종에 비해 예후가 좋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포엠스 증후군의 중앙 생존 기간은 14~15년으로 다발성골수종이 5.5년인 것에 비해 훨씬 길다.


환자와 가족들은 의사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우리는 정확한 병의 진행 상태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알고 싶고, 이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줄 친절한 의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의사들은 그렇게 친절하지도 한가하지도 않은 것이 현실이다.


내가 묻기 전까지 병원에서는 남편의 병이 다발성골수종이라고만 얘기했기 때문에 나는 필요이상으로 깊은 절망에 빠져야 했다. 이는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진단명이 환자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발성골수종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버리는 순간, 졸지에 남편에게 남은 시간이 5.5년으로 한정되어 버리는 것 같아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내가 본 통계치들은 연구대상이었던 수많은 환자들을 평균적으로 설명하는 것일 뿐, 지금의 남편에게 정확히 적용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상대 생존율은 암 환자가 암 이외의 원인으로 사망할 가능성을 보정해 추정한 생존 확률인데, 일반 인구의 기대 생존율과 비교하여 그 값을 구한다. 솔직히 나는 이 수치들이 와닿지 않는다. 나의 기대 생존율 따위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을뿐더러, 내가 어떠한 원인으로 사망할 가능성을 따져가며 살지 않으니까...


게다가 만 38세의 건장한 남성이 혈액암, 그것도 희귀 암에 걸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포엠스 증후군은 혈액종양내과 전문의조차도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는 극희귀혈액암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 희귀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300명- 300,000명 사이인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전 세계 인구가 70억이라고 친다면, 남편이 이 병에 걸릴 확률은 가장 보수적으로 잡아도 0.00043%이다. 이미 남편에게 통계치나 확률 따위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 나는 남편이 과연 포엠스 증후군이 맞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저 그에게 나타나는 증상을 종합해 보았을 때 현재까지 파악된 가장 가까운 병명이 포엠스 증후군이 아닐까? 어쩌면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병 중 하나일지도 모르는 것 아닐까?


나는 내가 읽은 모든 수치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남편의 진단명은 의학적 처치를 결정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일 뿐, 남편의 상태를 규정하는 이름표가 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정신승리라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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