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그대가 겪는 슬픔도 괜찮으니까
근래 들어 나를 돌아보는 것이 캠페인처럼 번져 간다. 나를 토닥이고 칭찬하고, 쉬게 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도 좋고 단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 또한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무거운 과제를 빌미로 정작 자신에겐 관대할 수 없는 지금은, 마치 정자세로 앉아 벼루에 먹을 갈아서 앞에 놓인 한지 위에 ‘나’라고 쓰고서 침묵이라도 해야 그나마 좀 나을 듯하다.
나를 돌아보고 나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행위다. 사람이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겠지만, 보통은 모든 것을 내 위주와 내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니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이들은 나를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 내 옆 사람은 잘 나가는 엘리트라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쭉쭉 뻗어 가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이냐면서 타박한다. 혹 옆 사람이 경쟁 관계가 아닌 사랑하는 관계라 할지라도, ‘넌 대단해. 나보다 훨씬 낫잖아. 여러모로 봐도…’ 이런 식의 접근이 이뤄진다. 자신에게 엄격한 것은 좋지만 조금은 안타깝다.
그러나 이보다 더 경계해야 할 대상은 ‘자아 존중감’, 흔히 ‘자존감’이라고 불리는 이것에 대한 남용인 것 같다. 그러면 대체 자존감이라는 건 뭘까 하고 찾아봤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 self-esteem)이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출처 : 위키백과
다행히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음에 감사하다. 이 정의에 따르면, 나를 사랑하고 아끼려면 자존감은 필수적으로 높아야 한다. 그 말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자존감이 낮으면 나를 사랑하고 아낄 수 없다는 게 된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요즘 누구랄 것도 없이 힘들다고 하면, “에이~ 네가 뭣이 힘들어.” 이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아무 말 없이 공감하고 고개 끄덕인다.
이처럼 힘든 시기인 걸 알면서 정작 하소연을 털어놓으면, “아무개야, 넌 자존감이 낮은 거 같아.”라고 하고, 심지어 방송에서도 자존감 높이는 법을 이야기하는 일이 잦아졌다.
현실이 힘들고 절망 가운데 있는데, 자신을 두고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무지 말이 안 된다. 그런 상황이 되면 감정은 전부 부정의 색으로 물든다.
“나는 왜 이 따위며, 내 역량은 왜 여기까지 일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이 커버해 줘야 할 것 아닌가? 그게 국가고 사회지….”
이런 넋두리를 하게 되는데 그 속에 사랑이 어디 있고 존중이 어디 있겠나? 기분이 바닥으로 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우울했다가도 한 순간에 기뻐질 수 있는 놀라운 탄력을 가진 스프링을 가졌기 때문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무쌍한 감정의 흐름은 신께서도 막지 않으신다. 짧은 생 가운데 느낄 슬픔과 분노의 시간은 기쁨이나 즐거움의 시간만큼이나 값지다.
왜,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도 알 수 있듯 슬픔이는 모두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지만, 때로는 슬픔이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는가?!
그러니 미안한데 자존감 이야기 좀 그만하자… 가끔은 그대가 겪는 슬픔도 괜찮으니까.
본문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본문 이미지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 2015年 作>의 스틸 컷이며 ‘네이버 영화’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저작권은 해당 영화 제작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