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에 지난여름을 떠올려 본다.
본디 여름의 색은 강렬하고 무자비해서 좀 과장해서 말하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지만, 올여름은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땀은 하염없이 흘러 정신까지 몽롱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의지적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내 일상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PC의 전원도 켜지 않았고, 연락도 끊었다. 그리고 거실에서 뒹굴뒹굴거리며 리모컨만 깔짝거리는 일만을 꽤 오랜 시간 지속했다.
스스로는 이를 두고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는 것이라며 위로를 했으니 아마도, 요즘 들어 충만하게 끓어오르는 욕구인 ‘걱정하지 않으면서 사는 삶’을 구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걱정은 조금도 줄지 않았고, 한켠에 자리한 ‘욕심덩어리’ 또한 버려지지 않았다. 다만 평소에 살아왔던 모습인 타인 위주의 삶에서 벗어나 나와 가족들에게 집중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걱정이라고 말하니 무슨 대단한 큰일 같은데 그런 건 아니고 내게만 일어나는 지극히 사소한 것들 말이다.
어쨌든 그래서 한시적 절필을 했던 이유는 결국 더위 때문이었다.
앞서 이야기 한대로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자신과 가족에게 집중했다. 평소에 가족들과는 대화가 많은 편이긴 해도, 더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서로에 대해 탐구했다. 피를 나눈 사이이기에 소위 민낯이라고 불릴 만한 저기 깊숙한 것까지 공유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돌보지 못하고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들을 알게 되면서,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허나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점점 깊어져 갔다. 예컨대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자주 씻어야 하는 일 같이 자질구레하게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많아서다. 뭐, 평소에도 다르지 않으니 그냥 그런가 보다 넘기면 될 일이긴 하지만 폭염 속 노동은 더 신경 쓰이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평소에도 장애를 절대 당연시 여기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베풀며 살길 원하지만 가족을 위해 최선이라 생각하며 행했던 모든 일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상상도 못 할 희생들을 감내하는 것을 보면서, 숭고하게까지 여겨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간의 내 행실을 생각하면 티끌만큼도 못 따라왔기에, 부끄러움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자기 비하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실이다. 사람은 메뚜기나 매미처럼 한철을 살고 죽음을 맞는 게 아니라 신께서 허락하신 생을 다할 그 순간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평생 책임의 임무를 부여받은 가족을 떠올리자니 맘이 아렸다.
삶 가운데 빛나기 위해 사람들은 살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신께로부터 부여받은 빛을 안고 살아가면서 그분을 드러내라고 주어진 것이 삶이다.
하지만 나의 존재는 주님을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는 수단으론 아직 한참 모자라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빛나는 것조차 온전히 하기 힘든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됐던 지난여름이다.
내가 지나 온 자리가 여러 가지 찬란한 색으로 빛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곳에 내 흔적이 선한 것이 되어 남을 수 있다면. 나를 위해 희생했던 모든 사람들이 부디 행복할 수 있기를. 내 삶뿐만 아니라 죽음도 안타까워할 만큼 ‘필요했던 존재’로 기억되기를.
커버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