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기 어렵고 있을 수도 없는 일… PTL Time 21
JTBC의 한 프로그램인 <너의 노래는>의 에피소드 One에서는 최고의 작곡가이자 연주자인 정재일과 국보급 보컬 박효신이 함께 출연해 그들의 음악인생을 이야기했다. 언제나 그랬듯 둘은 좋은 음악을 위해 무엇이든 망설이지 않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한마디가 인상 깊었다.
‘자발적 격리’
세상과의 소통을 잠시 단절하고, 오롯이 자신과 동료만을 돌아보고 자연이 주는 신비한 흐름을 영감 삼아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는 멋진 일을 해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종류는 다르지만 나 역시 무언가를 짓는 사람이기에 격리를 달가워할지 모른다 생각할지 몰라도 이미 격리의 삶을 매일 살아내는 나에게는 결코 자발적일 수는 없다. 또한 아이러니한 건 어느 누구도 이 상황을 원치 않는다는 것.
오히려 광활한 세상이 목마르다.
남들은 자발적이란 표현까지 써 가며 세상과 격리되려 애쓰면서 살아가는데 나는 원치도 않는데 저절로 격리되어있다. (조금은 불공평하게 여겨진다.)
이쯤에서 날 창조하신 그분의 행적을 찾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성경 신약전서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를 보고 예수께 이렇게 묻는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한복음 9장 2절
개인적으로 나는 이 질문 자체가 공감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론 굉장한 우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주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과연 그 누가 하나뿐인 아들을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해 보내겠는가.
비록 끝내는 부활이라는 승리를 얻을 지라도 아들이 받을 엄청난 고통을 바라봐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부모의 입장에서 쉬운 일일까.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사랑의 하나님. 누가 뭐래도 그 자체의 사랑이신 분.
만약 장애가 징벌의 의미이고 그 연장선이라면 몸이 불편한 모든 이들은 전부 저주의 증거가 될 터.
다시 아까 제자들의 의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어떻게 답하셨을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장 3절
사실 이 말씀을 마주할 때마다 내 병이 곧 저주의 증거는 아니므로 감사하다. 하지만 이내 곧 이렇게 성토한다.
“주님, 이런 모지리를 대체 어디다 쓰시려고….”
절대 자아비판이 아니다. 누구보다 정확한 가치판단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타인에게 이런 표현… 즉 모지리란 소릴 들으면 요즘 말로 대노(大怒)하겠지만, 만일 듣는다고 해도 반박할 자료 같은 게 내겐 없다. 혹여 자료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려면, 주님이 내 변호를 하셔야 하는데 그러자니 고용 비용이 너무 비쌀 것 같다. 암튼 이런 모지리 조차도 잘 다듬어 쓰신다고 하니, 그건 아버지께 맡기고 나는 내 일만 할 뿐이다. 배운 건 많지 않아도 쓰는 능력만은 부여해 주셔서 이곳저곳 쓰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하는 일, 더 정확하게는 성과에 만족하지 못하겠다. 남들은 내게 대단한 거라고…, 한 줄도 쓰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그럴싸하게 위로하는데 공감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막상 보면 볼멘소리로 일관하며 엄살 피우던 사람들이 깜냥 것 해나갈 정도가 아니라 소위 대박을 치고 있고, 나는 도저히 그 틈에 속할 여력조차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왕 느리게 가는 길과 ‘세상이 목마르다.’고 할 정도의 마음밭을 허하실 거라면 격리가 아니라 행동을 부여하시고, 자유롭게 해 주시지.
그러면 느리지만 발바닥에 땀나도록 눈코 뜰 새 없는 매일을 삶으로, 좋은 사진들과 글로써 주님 일하심을 더 확실히 증명하지 않았을까.
혹자는, 사람이 자기만족하는 순간, 아래로 추락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워 봤으면 좋겠다. 더불어 내 글을 보는 많은 사람들 역시도 만족의 미소를 띠면 좋겠다.
그래서 나를 위해 일하시는 그분의 능력과 수고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내가 믿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온누리에 퍼졌으면
Why Not?(왜 저는 아닙니까?)의 성토가 아닌 Why Me?(왜 저입니까?)라고 감격하면서 물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어디다 쓸지 모를 모지리가 변하여 모든 이들이 감동할 만한 존재가 된다면 요한복음 9장 3절 말씀은 그야말로 실현되는 것일 테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가지 의문은 머릿속을 맴돌지만 나를 통해 주님 영광 받으시는 그날까지 묵묵히… 최선을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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