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L Time 40
사랑의 주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여쭙기 전에 주님! 저는, 영화 속에서 묘사된 캐릭터들의 모습처럼 때론 도로를 거닐다 휠체어에서 떨어져 다치기도 하고, 때론 살이 통통하게 오른 파리 한 마리를 잡지 못해, 그놈에게 제 콧등을 허락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굴욕적입니다. 주님도 그들의 가상 인생과 저의 실제 삶에 그리 큰 괴리가 있지 않음을 아시지요?
저는, 아버지… 당신을 믿고 의지합니다. 내 숨결과 모든 여정이 당신에게로부터 비롯됐음을 믿습니다. 그런 연유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 하물며, 그게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얻기 위해 주님을 버리지는 않을 거란 것도 아시지요?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이 모든 것 다 소용없으니까요. 제 믿음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대단치 않은 믿음이라도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 있음에도, 제 삶에 찾아오는 환란의 시간을 마주할 때마다 어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럴 때마다 주님 주시는 능력이 제게 임하시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평생 단련돼야 할 것 같아요.
이 시점에서 주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는 인생 가운데 겸손과 낮은 자존감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에서도 쓰였듯, 버러지 같은 인생이 우리네 인생이고 우리의 그런 인생을 주님께서 바꿔 주셨는데, 오늘날에는 어디까지가 별 것 아닌 인생을 돌아봐야 할 영역이며, 어디까지가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인생의 영역인지 모호합니다.
제가 지닌 능력은 한없이 모자라고 미천해서, 기적은 고사하고, 당연한 일 조차 염려해야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부족하고 또 많이 모자라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존감이 부족하다며 판단을 받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선박의 방향 틀듯 마음의 키를 돌려 조금만이라도 긍정의 빛 비칠라 치면, 믿는 자로서 겸손의 모습을 띠어야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사실 둘 다 맞는 이야기라 똑똑함과 거리가 먼 저로서는 헷갈립니다. 이럴 때면 자존감이란 말 자체가 싫어집니다.
코로나 정국 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과, 다른 한편에선 개인과 더불어 지역 사회를 아울러야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의견이 양립합니다. 물론, 늘 믿음이 먼저겠지요.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할까요? 진심으로 부족한 저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려 주세요.
작금의 시간을 보내면서 주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전보다 많아졌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허나 바라옵기는 위기의 상황에서만 떠올리는… 마치, 도깨비방망이와 같은 주님이 아니라, 그저 삶의 풍랑이 잔잔할 때에라도 일상을 고스란히 내어드리는 그런 삶 되게 해 주시길 진심으로 원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늘 기도드리듯 매일매일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며, 무탈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말씀, 낮의 해와 밤의 달보다 더 밝으시며 영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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