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러너로 살아가기
물을 무서워하던 남편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연애시절 남편과 바다에 놀러 가 카누를 빌려 탄 적이 있다.
파도도 없는 얕은 바닷가에서 노를 휘젓고 있는 게 심심해진 나는
물로 뛰어들어 카누를 끌고 걸어 다니다 물장구를 쳤다.
카누 위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앉아있던 남편은
조금씩 흔들리는 카누에 갑자기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얕디 얕은 물가에서 살려달라던 남편을 보며 황당했던 일은 두고두고 놀리고 있다.
물놀이를 함께 하기 위해서라도 남편에게 수영을 꼭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서워하는 그를 위해 입문반부터 함께 등록해
음파음파 호흡부터 같이 배워나갔다.
그 반에서 나는 보조 강사와 다름없었지만
차근차근 상급반으로 승급하며 연습을 병행하다 보니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재미를 붙인 남편은 강습시간 외에 배로 연습을 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나보다 자세도 기록도 좋아지고
재작년 말, 급기야 아쿠아슬론에 참가하자고 하는 거였다.
새로운 도전거리를 가져오고 함께 하자고 부추기는 건 내 역할이었는데,
남편의 변화가 어색하고 낯설기까지 했다.
수영을 하며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다이어트도 절로 되는 경험이 남편을 바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한다고?!
아쿠아슬론은 수영과 마라톤을 함께하는 종목이다.
수영은 경력을 기반으로 어떻게 한다고 쳐도, 달리기는 달랐다.
러닝의 기초도 모르던 나는 남편의 설득에 넘어가
그렇게 작년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3km를 달리는 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그마저도 얼마나 힘들게 뛰었는지...
러닝은 꾀를 부리기 어렵다.
실력은 연습한 만큼 정직하게 늘어나는 데 나는 어떻게든 덜 뛰고 싶었으니
기록이 영 늘지가 않았다.
아쿠아슬론을 목표로 했던 우리 부부의 도전은 어느새 사이클까지 더해진
미니 철인 3종 대회로 규모가 커지게 됐다.
참가신청을 해 둔 대회 날짜가 다가오자 마음이 급해졌다.
기왕 출전하는 데 완주라도 해야지 싶다가도
퇴근하고 각종 벌려둔 일까지 처리하다 보면 지쳐 나가떨어진 몸이 게으름을 불렀다.
아아. 내가 대체 왜 한다고 했지? 싶어질 무렵
나를 보다 못한 남편이 퇴근 후 주저앉는 나를 끌고 나와 함께 달렸다.
장 보러 갈 때도 5km 거리의 마트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억지로, 때로는 자의로 뛰는 날들이 쌓여갔다.
대회날. 한강물에 뛰어들어 수영하고,
젖은 채로 사이클을 타고 달리기까지.
완주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의 뿌듯함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거다.
작년 한 해를 마감하며 기록을 정리하다 보니
일 년 365일 중 3분의 1을 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헬스장에서만 100일을 넘겼고, 각종 장소에서의 야외 러닝까지...
12월 30일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무리한 탓인지 마지막 날부터 면역력 약화로 대차게 앓아눕고는
1월 한 달 달리기를 쉬었다.
그런데 이미 달리기의 맛을 안 몸은..
회복되자 슬슬 근질거리기 시작하는 게 한바탕 달려줘야 기분이 좋아질 거 같은 거다.
그렇게 2월부터 다시 조금씩 달리기를 시작했다.
설 연휴 고향에 내려가서도 매일같이 달리기를 하곤 개운함을 만끽했으니...
이쯤이면 정말 달리는 행위를 좀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러닝 2년 차인
올해는 더 신나게, 더 재밌게 달리고 싶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오늘.
맛있는 식사를 하고
서점도 들렀다 집에 오니 다시 밖으로 나가기가 귀찮았다.
이런 날엔 헬스장까지 걸어가는 십여분의 시간도 어찌나 멀게 느껴지는지..
이럴 때 써먹는 최고의 기법은
'조금만 하자'주문 외기다.
조금만, 쬐끔만, 진짜 완전 살짝만 뛰고 오자고 하는 거다.
'가서 진짜 러닝머신에 발만 올려도 성공이야!' 하고 스스로 되뇌다 보면
발이 떼어진다.
막상 뛰기 시작하면, 또 금세 오 분, 십 분, 조금만 더, 하면서 뛰어진다.
신나게 뛰고 나서
땀 낸 몸을 말끔하게 씻어주니
발걸음도 한층 더 가볍고, 무엇보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오늘도 달리기 성공이다!
카누 위에서 겁에 질려있던 그 남자에게 수영을 가르치려 시작했던 일이,
이제 결국 나를 신나게 달리고 있게 하다니..
참 희한한 인생의 반전이지만, 나는 이 반전이 꽤 마음에 든다.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등 떠밀리듯 시작한 러닝이었을지 몰라도,
달리면서 느끼는 해방감은 온전히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러닝 2년 차, 올해의 목표는 거창한 기록 경신은 아니다.
그저 오늘처럼 나 자신을 살살 달래 가며, 귀찮음을 이겨내는 '딱 조금만'의 마법을 부려보는 것.
그렇게 쌓인 사소한 조금들이 모이다보면,
조금 더 뛰는 게, 사는 게 재밌어지겠지.
딱, 조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