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일교차가 더욱 크게 느껴지던 깜깜한 밤이 지나고 나는 침낭을 부스럭거리며 아침 일찍 일어났다. 추울까 봐 밤새 덮은 두툼한 담요는 꽤나 효과가 있었다. 비록 라디에이터만은 못하지만, 담요 덕분에 조금은 따듯하게 보낼 수 있었던 날이었다. 얼추 준비를 끝낸 나는 나무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조식을 먹으러 가는 발걸음은 항상 가볍다) 1층으로 내려간 나는 신부님의 안내를 받으며 공용식당으로 이동을 했는데 그곳엔 이미 몇몇의 순례자분들이 일찍이 내려와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이곳의 조식은 기부제로 운영을 하고 있었다. 파란 통 안에 일정 금액의 돈(기부금)을 넣으면 식탁 위에 있는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신부님께서는 나에게 먹는 방법과 식탁 위의 음식들을 설명해 주셨고 같이 동행한 언니들에게 자기가 알려준 대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조금 지나자 언니들이 식당으로 내려왔으며 난 신부님께 들은 대로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게 모두들 한쪽에 놓인 흰 접시를 들고 차례로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차례가 되어 먹고 싶은 음식을 담고 따듯한 커피를 마시기 위해 레인지 앞에 서성거렸는데 그때, 한 외국인 순례자가 대뜸 나한테 말을 걸었다.
(내 흰 발가락 양말을 가리키며)"와 이건 발가락 양말이잖아? 너무 좋아 보이는데?"
나는 갑작스러운 양말 칭찬에 약간 꼬질꼬질해진 내 흰 발가락 양말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신고 나면 좀 창피한 발가락 양말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조금 뿌듯하며 자랑스러웠다.
(*순례길에선 발가락 양말을 적극 추천한다. 다만, 흰색이 아닌 검은색을 사길 바란다.)
빨간 체크무늬 식탁보에 둘러앉아 조식을 다 같이 먹고 우리는 다음 마을에 갈 채비를 했다. 따듯했던 신부님의 인사와 담백한 식사를 뒤로한 채 다시 길을 떠났다.
이제 제법 쌀쌀한 가을 날씨를 띈 스페인이었다. 비록 구름이 많이 뒤엉켜있었지만 그럭저럭 걸을만했다. 거리의 나무들도 하나둘씩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고, 우리가 걸어온 길에는 낙엽들이 조금씩 쌓여만 갔다. 사부작사부작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레온(Leon)이라고 써진 크고 흰 표지판을 지나치며 그렇게 쭉 걸어갔다.
(다음 대도시인 레온이 한층 더 가까워진 날이었다)
그러다가 지칠 무렵에 작은 바르에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했다. 11월이 되니 하나둘씩 난로를 틀었는데 그 덕분에 바람으로 차가워진 몸을 따듯하게 녹일 수 있었다. 카페 콘 레체 한 잔과 또르띠야 한 조각을 먹으며 따듯한 열기를 뿜어내는 난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늘은 일요일이었고 우리는 점심으로 참치주먹밥을 먹을 예정이었다. 주말에는 식당들이 문을 닫은 경우가 많아서 밥을 싸가지고 다녔다. (참치주먹밥은 오늘 아침 알베르게 주방에서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있는데 먹을 장소와 식기가 없었다. 마땅히 먹을 장소도 없었거니와 젓가락이나 숟가락 등 식기가 없어 정말 곤란했다. 배는 고파오는데 주변엔 마트도 없었고 혹여나 있어도 젓가락을 파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이대로 못 먹거나 손으로 먹어야 될 판이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그냥 바르가 나올 때까지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었고 그마저도 힘들어서 걷다가 쉬고 그랬었다.
그때, 한 언니가 한국 신라면을 판다는 바르를 발견했고, 나는 그곳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귀여운 고양이 2마리가 반겨주는 이 바르는 인기가 많은지 안에 정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우리는 싸 온 주먹밥을 먹기 위해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고, 각자 음료를 주문하면서 혹시 숟가락과 젓가락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정말 감사하게도 음료만 시킨 우리에게 사장님은 흔쾌히 5인용의 젓가락과 숟가락을 빌려주었고 그 덕분에 다행히 우리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정말 무리한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사장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Muchas gracias!
쭉 뻗은 길은 걷기엔 좋았으나 시간이 많이 지체된 탓에 후반부로 갈수록 체력이 점점 떨어져 갔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컨디션이 많이 다운되어 있었는데 하필 저녁 먹을 곳도 마땅하지 않다는 얘기를 들어버렸다. 일요일답게 문을 연 식당은 없었고 우리가 저녁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갈 알베르게의 저녁 순례자 메뉴뿐이었는데 그게 또 채식이어서 솔직히 걱정이 많이 되었다. 힘을 뺀 날은 무조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약간의 고집이 있는 나였기에 힘이 든 날은 항상 고기가 들어간 메뉴를 먹어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채식이라니..??
메뉴가 채식뿐이라니..!!
걱정반 호기심반 마음을 가지고 늦은 오후 석양이 아름답게 지는 시각에 무사히 오늘 묵을 알베르게에 도착을 했다. "요정의 집"이란 뜻의 숙소는 자연 친화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이었고, 지금까지 보던 알베르게와는 너무도 달랐다. 위층으로 올라간 우리는 짐을 풀고 씻고 있었는데 아래층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간 했던 걱정이 무색할 만큼 감탄이 나오는 냄새였다.
저녁은 체코에서 온 한 순례자분과 같이 먹었는데 애피타이저로 샐러드, 메인으로 렌틸콩카레 그리고 디저트로는 한 대접에 나온 후르츠칵테일 과일이 순서대로 나왔다.
샐러드는 입맛을 돋우기에 딱 좋은 깔끔한 맛이었고 뒤에 이어서 나온 카레는 내가 여태껏 먹어본 카레 중에 제일 맛있었던 음식이었다. 약간 초록빛의 가까운 카레는 나의 채식에 대한 편견을 깨준 정말 맛있었던 요리였고, 그런 음식과 함께 체코에서 온 순례자와 소소한 담소를 나누었다.
이런 포실한 분위기 속, 뜻깊은 순례 17일 차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