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이제는 당연해진 쌀쌀함과 함께 오늘도 눈부신 아침을 맞이했다. 이날은 약간의 설렘을 가진 채 아침을 먹으러 계단을 내려갔는데 그 이유는 바로 대도시인 '레온(Leon)'에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레온에서 연박의 일정을 잡았는데, 난 그 연박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열심히 걸은 후 얻는 달콤한 쉼이 레온에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도무지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제 근사한 저녁을 먹었던 자리에는 소박한 아침 식사가 꾸밈없이 자리해 있었다. 신선한 사과와 건강해 보이는 식빵, 달달한 마들렌과 꾸덕한 요거트까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아침식사 메뉴이지만, 순례를 하는 동안 흔하게 먹어왔던 탓일까? 그런 것에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나였다.
나는 잠깐의 틈을 타 지난밤 쓰지 못했던 일기를 마저 쓰고, 양치를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레온으로 떠날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는 하나둘씩 문을 열고 나왔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날씨가 꽤 추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배낭을 메고 걸어 그런지, 다리는 계속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그냥 꾹꾹 참았다. 가다 보면 언젠가 도착을 하겠거니-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길을 천천히 걷다가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APTC"란 이름을 가진 한 바르에 들어가 추운 몸을 녹여줄 카페 콘 레체를 주문하곤 조금의 휴식을 취했다.
그곳에서 난 노란색 일기장을 꺼내 글을 적었고, 다른 언니는 가족과 통화를 하며 각자 시간을 보냈다. 사람이 북적이는 이 바르는 참 따듯했다. 그 따듯했던 바르를 뒤로 하고 다시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순간 뭐지? 하며 우리들은 뒤를 돌아봤는데, 글쎄 한 청년이 1.5리터 물통을 들고 우리 쪽으로 뛰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생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내가 물을 안 챙기고 나왔다는 것을...
자칭 물의 요정으로서 우리들의 물 담당은 나였다. 그래서 항상 내가 물을 책임지고 들고 다녔었는데, 이때 잠깐 깜빡하고 바르에 놓고 나와버렸다. 그렇게 우리가 물을 놓고 간 사실을 알아챈 바르 알바생(아마 주인집 아들내미였던 걸로 추정되며 그곳에서 일손을 돕고 있었던 것 같이 보였다)이 허겁지겁 우리를 불러 세운 것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레온까지 물 없이 갈 뻔했던 우리였었다. (정말 고마웠었다ㅜ 이름이라도 알아둘걸..)
다시 한번 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구나-를 느끼며 제법 많이 쌓인 노란 낙엽들과 하늘로 길게 쭉 뻗은 얇은 나무들을 지나치며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완연한 가을 풍경을 바라보고 만끽하며 걸어갈 때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발견했다. 강물 위에 멋스럽게 놓인 다리를 건너며 양 옆을 바라보니 주위엔 나무와 물만 조용히 있었다.
나는 이런 사실이 꽤나 좋았다. (진정한 자연 속에서 걷는 느낌이니까!?)
점차 그런 모습들이 사라져 가고 긴 도로와 넓은 표지판이 나올 때쯤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근처에 있는 마트에 가서 빵과 커피를 사고 빈 나무 테이블에 앉았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났던 땀을 식히며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멀게 느껴진 레온이기에 우리는 서둘러 일어나 다시 걸어갔다. 아직은 포장도로보단 자갈길이 좀 많았고 길도 굽이 진 길이 많았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았지만,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레온이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조금씩 내려가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붉은색 지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려오면서 보이는 조그만 건물들이 그 뒤로 끝없이 있었고 그때 우리는 다 같이 직감을 할 수 있었다.
저곳이 레온이라는 것을!
이제 레온이라는 도시가 눈에 보이자 더 힘을 내서 갈 수 있었다. 곧 도착한다는 설렘과 대도시라는 안도감 그리고 내일은 휴식을 취한다는 기쁨이 마구 섞여 오묘한 감정을 끌어내었다. 큰 도시답게 레온은 들어가는 것부터 숙소에 도착하는 것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지만, 그만큼 더욱 뿌듯한 마음이 들었던 순례길이었다.
이윽고 숙소에 무사히 도착한 나와 언니들은 친절한 호스트의 설명을 듣고 거실이 딸린 좋은 컨디션의 숙소에서 무거운 짐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저녁에는 H오빠가 추천해 준 뷔페를 갔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H오빠와 로스아르고스(Los Arcos)에서 만난 선생님과도 마주쳤다. 아직은 조금 어색한, 그렇지만 만나면 반가운 인연들과 인사를 한 후 유난히 깜깜하고 쌀쌀했던 그 길을 다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