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륭짱 Oct 03. 2023

순례 29일 차: D-2, Santiago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1/17 목요일 Walking D+27 & Stayed 2(Logroño, Leon)

Portomarin(포르토마린) -> Palas de Rei(팔라스 데 레이) 약 28km


나무로 된 아늑한 숙소를 벗어나 아침을 먹으러 한 식당에 들어갔다. 다름 아닌 이곳은 무려 호텔이었는데 1층에 조식뷔페도 겸하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각종 빵부터 쨈, 오트밀, 주스 등 기본적으로 유럽에서 아침으로 먹을만한 음식들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내부도 모던하니 깔끔하여 순례복장인 내가 조금은 부끄러운 순간이기도 했었다. 

들어가서는 서버분께는 양해를 구하고 한쪽에 우리의 순례배낭과 스틱을 두며, 흰 접시에 각자 먹을 것들을 담기 시작했다.



자칭 빵순이로서 나는 빵을 매우 좋아한다. 이번 순례길에서도 거의 주식이 빵이었는데 한 번도 질린 적이 없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최대한 다양한 빵들을 먹어보자! 하고 여러 종류의 빵들을 담았다.

기본 네모난 식빵부터 크루아상, 뺑오쇼콜라 그리고 도넛까지 빈 접시를 내 욕심만큼 가득 채워나갔다. 주로 빵과 쨈을 곁들어서 간단히 먹는 순례길 아침식사였는데, 만약 좀 든든히 먹고 싶으면 치즈와 햄을 올려먹기도 했다.


하지만 약간의 착오로 인해 5유로인 줄 알았던 아침식사가 10유로로 되어버렸을 땐, 입맛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추가로 먹을 땐 돈을 더 받는다고 했으며, 그 사실을 뒤늦게 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더 내고 먹었다. 근데 이러면 뷔페가 아니지 않나..? 흠.. 아무튼..)

그래도 아침을 든든히 먹고 출발할 수 있어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다양한 쨈들과 빵을 마음껏 먹어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신선한 아침식사를




오락가락하는 날씨 속에 열심히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만 날씨가 심히 변덕스러워서 우비를 중간에 입고 걸었으며 비도 오고 바람도 불어 조금은 쉽지 않은 날이었다.

우비를 입고 벗고 입고 벗고를 반복하니 우비 안 속 옷이 꽤 젖었다. 조금은 찝찝했지만, 내가 언제 비를 맞으며 길을 걷겠냐- 하는 마음으로 긍정의 회로를 돌리며 열심히 걸었다.


그러다 중간에 거리가 벌어지게 된 순간이 있었다. 모두 걷는 속도가 제각각이어서 그랬는데 조금씩 차이를 두고 걸으니 어느새 혼자 떨어지게 되었다. 혼자 걸으며, 비를 맞으며, 음악을 들으며 투명하게 빗물이 고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역시 이런 날씨에는 잔잔한 음악이 어울린다. 하지만 너무 처지지 않게 약간은 템포가 있는 멜로디로 음악을 골라 들었는데, 이때 발견한 노래가 *나의 18번이 되었다. 하나의 노래에 꽂히면 그것만 주구장창 듣는데 이 음악도 그러했다.


제법 비가 오는 날씨였지만 재밌는 광경들도 보았다. 일단,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78km가 남았다고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큰 비석도 보았고 조그만 천막 안에 여러 마리의 소들이 들어가 비를 피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천막이 작아서 그런지 머리만 안에 있었고 엉덩이는 밖에 나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워 보였다. 


 D-2


어느 정도 걸었을까 Palas de Rei라고 쓰인 표지판을 드디어 마주했다. 다만 이제 마을 입구에 온 것이지, 숙소까지는 조금 더 걸어가야 했었다. 


그렇게 순탄하게 숙소까지 가나 했는데 갑자기 길목 앞에 흰 차가 덩그러니 서있는 게 아닌가.


'왜 안 움직이고 그냥 가만히 있지?'


라고 나는 무심코 생각을 하며 그냥 지나쳐갔는데, 알고 보니 차가 시동이 꺼져서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내 뒤에 오는 언니들이 우비를 입은 채 빗속에서 그 차를 미는 것을 봤을 때, 난 아차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차 옆을 지나간 나 자신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을 먼저 청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스스로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행히 언니들이 열심히 차를 밀어 이 사건은 해결이 되었던)


숙소에 다다랐을 때쯤 비가 엄청 많이 왔고 우린 다 젖은 생쥐꼴이 되었다. 먼저 도착한 대로 씻으며 저녁을 먹었고 숙소에서 세탁까지 했다. 아침을 먹고 길을 걸어 다음 마을에 도착한 후 씻고 점심 or저녁을 먹고 세탁을 하는 이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이 두 번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하루였다.


나의 부끄러움



*10cm - 그라데이션

이전 11화 순례 28일 차: 빗속에서 만난 100km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