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잘생긴 거 빼면 아무것도 없는 남자
먼저 C를 좋아한 것은 K였다. 한인 유학생 모임에 나갔다가 눈에 띈 C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잘생긴 외모에 훤칠하게 큰 키는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C는 K보다 4살이 어렸다. K는 고백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모임에서 다른 또래 남자애들이 K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애썼지만 정작 C는 K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며칠 후, K는 외출을 했다가 집에 들어가는 길에 런던 브리지 기차역에서 C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집에 들어가는데 기차 시간이 애매해서 말이야.”
거짓말이었다. C를 만나기 위해 한 거짓말. 그런데 분명 거짓말인 걸 알았을 텐 데도 C는 K를 흔쾌히 만나겠다고 했다. 둘은 커피를 마셨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온 건지 K는 C에게 “나 너 좋아해.”라고 고백을 했다. C는 당황해서 “누나…”라고 대답하더니 말이 없어졌다.
“내가 싫은 거지? 알았어. 집에 갈래.”
부끄러운 마음에 일어나서 집에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C는
“이렇게 가면 안 되지. 맥주 한잔하고 갑시다. 누나”
불쾌했다. 자기가 맘에 들지 않으면 그냥 집에 가면 되지 왜 자꾸 맥주를 마시자고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맥주 한잔을 시켜 놓고 서로 쳐다보기도 민망하여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같이 맥주를 마시는데? 집에 갈래.”
“누나, 가지 말고 기다려봐요. 싫다고 하지 않았잖아요.”
“누구 놀리는 거야?”
“나도 누나 좋아요. 좋은데 모임 사람들도 다 보고하는데 사귀고 그러면…”
“그래? 그럼 관둬.”
벌떡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C가 K의 팔을 낚아채더니 키스를 했다.
“좋아한다고요.”
그날 이후 둘은 커플이 됐다. 잘생긴 C와 예쁜 K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뒤돌아서 쳐다보고 갈 정도로 둘은 눈에 띄는 선남선녀 커플이었다. K는 행복했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이상형의 남자와 사귀는 사이가 되다니. 날아갈 것 같았다. 4살이나 어렸지만 오빠처럼 자신을 이끌어주는 C가 멋졌다. 그러나 그땐 몰랐다. 잘생긴 외모가 그의 전부란 것을. 얼마 후, C는 어리바리한 친구가 없냐고 물었다.
“어리바리한 친구는 왜?”
“여행이나 갈까 하는데 어리바리한 놈 하나 데리고 가서 공짜로 여행 좀 할까 하고 말이야.”
“그러지 마. 차라리 내 돈을 써.”
“그러려고 한말이 아니잖아. U가 좋겠어. 걔한테 여행 가자고 해봐.”
C의 고집을 말릴 수는 없었다. K는 U에게 전화를 걸어 여행을 가자고 했고,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면서 U는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여행을 가서 한 이틀은 잘 지내는가 싶더니 이틀째 되는 날 잡음이 나기 시작했다. C는 원래 계획대로 U를 속여서 여행경비를 많이 내게 한 뒤 자기가 그 돈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어리바리할 줄 알았던 U는 C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버럭 화를 냈다.
“누굴 호구로 아나. 나이도 몇 살 안 쳐 먹은 게.”
“뭐 나이? 이게 어디서 죽을 라고.”
이들의 싸움 중간에서 K는 당황스러웠다. 감정적으로 C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건지, 잘못이 없는 U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결국 둘의 싸움은 어색하게 끝이 났고, 모자란 경비는 모두 K가 물어줘야만 했다. C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질 때마다 그 모습이 점점 무서워지기도 했다. C는 네 살이나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K를 아이 취급했다. 어쩌다가 K가 C를 안으려고 하면
“쪼끄만 게 왜 이래.”
“내가 뭐가 쪼끄매.”
“청바지랑 티셔츠 입고 한번 나가봐. 누가 널 스물여섯 살로 보나. 중학생인 줄 알걸.”
“쪼끄맣지 않아. 내가 너보다 누나잖아.”
속상했다. 처음엔 애틋했던 스킨십도 언제부터인가 K가 너무 아기 같다는 이유만으로 조금씩 시들해졌다. 급기야 지친 감정에 K가 C에게 결별선언을 했다. 맘대로 하라고 할 줄 알았던 C는 화를 냈다.
“헤어지자는 게 말이 돼? 너 나 없이 살 수 있어?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C가 화를 내자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래. C가 없이 내가 어떻게 살겠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불안 불안한 순간이 몇 번 있었지만 C와 K는 위기를 잘 극복하는 듯했다. 적어도 C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1년짜리 어학연수로 영국에 온 C. 아직 해야 할 공부가 많이 남아 몇 년을 더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 K로서는 C가 집에 돌아간다는 게 불안했다.
"집에 안가고 더 있으면 안 돼?"
"여유 있게 유학생활을 할 수 있는 너 같은 애가 날 이해할 수 있겠어?"
함께 살던 집에서 학교 갔다 돌아올 K를 매일 기다리던 C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나도 공짜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고. 하지만 희망은 없어"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K는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K가 할 수 없는 선까지 이미 넘어서 있었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C가 영국에 머물러 있게 할 수는 없었다.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C는 “우리는 절대 헤어질 사이가 아니야”라고 단언했다. 그러다가 C가 한국에 돌아간 지 채 두 달이 안 됐을 무렵 K는 뭔가 잘못됐 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이별의 신호인 줄은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전화를 받지 않고 연결이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상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바빠서”를 연발했던 C. 얼마 후 전화가 왔다.
“미안해.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우리 헤어지자.”
그는 K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했다. 1년간의 만남은 어이없게도 전화로 끝이 났다. 전화를 끊고서 K는 큰 충격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별을 얘기한 날은 하필이면 집으로 돌아가기 날이었다. K를 태우고 공항으로 갈 택시는 벌써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C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K에게 결혼을 얘기했었다.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가 너고 난 너랑 결혼할 거라고. 내 인생에 여자는 너뿐이라고. 그렇게 단언하던 사람이 고작 서너 달 만에 이렇게 쉽게 마음이 변할 수 있다니. 한국과 영국의 먼 거리처럼 두 사람의 감정의 거리도 고작 몇 달을 버티기 힘들 만큼 멀었던 걸까. 택시가 출발하는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별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던 누군가의 자리가 갑자기 쑤욱 하고 빠져나갔다니. 상실감보다 이별을 믿기 힘든 당혹스러움, 충격.
공항에 도착했을 때, K는 갑자기 가방을 떨어트렸고, 여권이 바닥에 떨어진 것도 모른 채 멍하니 길을 걷는데 뒤에서 어떤 남자가 여권을 건네줬다. 어떻게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경유지인 오사카에 내려서 하룻밤 자고 가야 했는데 그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흐르는 눈물을 참으면서 거울을 봤다. 내가 버림받을 만큼 못난 걸까. 매력이 없는 걸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또 봤다. 슬픔은 그 후에 찾아왔다. 이별이란 단어가 쿵하고 박히고 마음속에서 그가 떠났다는 것이 점점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 뒤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화기를 눌러보면서 오지 않은 메시지와 전화를 기다렸다. 밥을 먹으면서 괜히 옆을 둘러봤다. 혹시 C가 와서 옆에 있을 것만 같아서. K는 서툰 솜씨지만 그가 좋아하는 아침밥을 지어줬고, 먹성이 좋았던 C는 한 두 공기씩 밥을 잘 비웠다. 분명 내 옆에 더 이상 그 사람이 없는데도 옆을 돌아보면 그가 있을 것만 같았다. 길을 걸으면서도 티브이를 보면서도 친구를 만나면서도 계속 C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K의 마음과 상관없이 이별은 그녀의 눈앞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분명 돌아와서 잘못했다고 할 거야.”
“후회하고 있을 거야. 나 같은 여자를 버리고 간 것을.”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 미련? 혹은 망상에 빠져 현실이 될 수 없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그를 기다려본 적도 많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별의 상처가 다시 아물어 새살이 돋는 데까지 꼬박 1년이 넘게 걸렸다. 그와 만난 시간만큼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린 것이다. 처음 이별을 한땐, 그 사람 이외에는 더 좋은 사람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K에게는 전부였고 모든 세상이었고, 그 이상의 무엇이었던 C. 그렇기 때문에 원망과 분노는 슬픔만큼이나 컸다. 나를 버렸다는 원망, 나같이 괜찮은 사람을 배신했다는 분노.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냥 멋있어 보였던 C가 어느 틈에 시시해 보였다. 대단해 보이던 그의 모든 면면들이 그저 지지부진한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을 때쯤. K는 어느새 홀로 임에 당당해져 있었다. 혼자지만 괜찮은 때가 찾아온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와의 사랑은 예쁜 사탕 봉지처럼 화려하지만 텅 비어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남은 사탕 봉지는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그저 예쁜 겉모양만이 한때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기억할 뿐이었다. 의미 없이 봉지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결국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깨달았을 무렵, K는 이제 더 이상 C의 그늘에서 울지 않았다. 그런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틈에 K의 마음속에 큰 흉터는 아물고 새살이 돋아서 언제 아픈 기억 덩어리가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더 단단해졌다. 불안정한 C의 그늘 대신 안정적이고 튼튼한 K로 서 있게 된 거다.
“시간만이 답이다.”
라는 말이 그냥 빤한 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뻔한 대답이 정답이다. 시간은 흘러가게 돼있다. 마음도 시간처럼 흘러간다. 다만 우리의 마음은 시간과 정비례해서 흘러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시간보다 빨리 혹은 비슷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의 마음은 시간의 속도보다 몇 배 느리게 흘러간다. 시간이 저만큼 흘러갔는데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마음이 서있다. 그러나 이걸 두고 잘못된 마음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성격이 모두 다르듯이 우리 마음도 모두 다르다.
“아직도 그 사람 생각하는 거야?”
“우리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에 대해 영향력이 없다. 오로지 마음을 다스리는 힘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K는 남들이 들으면 웃을 만한 바보 같은 미련과 후회를 가득 안고 있다. 하지만 이제 안다. 이 더디고 힘든 마음도 언젠가는 흘러갈 거라는 것을. 멀리 흘러가버리고 나면 다시 새로운 시간의 출발점 앞에 설 거라는 것을. 그리고 새로운 사랑은 내게 다시 천천히 흘러 들어올 거라는 것을.
"노를 젓듯 마음을 저어보았지요. 저기 멀리 시간이 서 있네요. 붙잡을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곧 나도 그곳으로 흘러갈 거니까.” K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