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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지혜 Aug 16. 2023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는
달콤한 거짓말

(4). 왕자님은 퇴근하셨습니다. 

           알람이 울렸다. '왕자님'이 나타나신 거다. K는 항상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작은 배처럼 불안해 보였다. 물이 넘치기 직전의 컵이지만 더 채워져서 이제 곧 완전히 넘칠 것만 같은 간당간당 불안한 물 컵, 그게 바로 K였다. K는 불안감과 결핍을 사람에게서 채우려고 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사랑했다. 그러나 가득 채워진 적은 없었다. 한 사람이 떠나고 나면 또 한 사람이 마음에 들어왔다. Y는 K의 마음이 가장 불안하던 스물한 살, 그 무렵에 나타났다. Y가 누구냐고 물어봤을 때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백마 탄 왕자? 적어도 멋진 왕자님 같았죠.” 모든 것이 완벽했다. 꿈에 그리던 왕자님을 드디어 만난 것이다.      


            90년대 한창 나우누리와 천리안 등과 같은 인터넷 통신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K는 이제 막 스무 한살, 대학교 3학년이었다. 전화기에서 선을 하나 빼서 컴퓨터에 연결한 뒤 삐삐빅 하는 신호음이 들리고 컴퓨터 화면에 누군가 “안녕하세요." 하고 말을 걸었다. 신기했다. 코드 하나만 연결하고 삐삐 소리만 한번 들렸을 뿐인데 갑자기 이 화면에서 저 너머 다른 화면 속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다니 말이다. 일순간에 인터넷 통신에 빠졌다. 시모임에 가입해서 시작활동도 했고 좋아하는 심리학과 철학 관련 방을 만들어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사귀었다. 그런 와중에 만나게 된 것이 Y다. 여느 때처럼 좋아하는 시나 철학가의 말을 인용해서 방을 만들었는데 Y가 K가 만든 채팅방에 들어왔다. 대화는 흥미진진했고 어느덧 몇 시간이나 함께 얘기했다. 그렇게 몇 번 대화를 했을까. 그 사이 둘은 채팅뿐만 아니라 전자 우편도 여러 번 주고받은 사이가 됐다. 얼마 안 되어 Y가 만남을 제안했다.      


            K는 불광동 그 중에서도 가장 끝자락 불광3동에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까지 K는 자신의 동네가 창피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주변 친구들도 다 비슷비슷한 동네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학교에 가자 사정이 달라졌다. 3호선 맨 끝 쪽 구파발 바로 전역인 연신내역에 사는 K에게 참 멀리서도 학교 다닌다고 비아냥거리는 친구도 있을 정도였다. 티브이 드라마에서는 못 사는 사람들의 동네로 불광동이 대표명사처럼 등장했다. 그래서 K는 누가 어디 사냐고 물어보면 목소리가 작아지곤 했다. Y에게도 그랬다. Y를 만나러 강남역 2번 출구에 가던 날, 언니가 입지 않는다는 낡은 회색 치마를 빌려 입고 나갔다. K는 어쩐지 내 모습이 초라한 건 아닌가? 신경이 쓰였다. 잠시 후 Y의 차가 도착했고 그와 함께 파스타 집에 갔다. K가 알던 주변 남자들과 모든 것이 다른 Y. 그는 K 아빠보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비싼 파스타를 사주고 근사한 호텔 바에서 칵테일도 사줬다. Y의 친구들이 그는 재벌 아들이고, 자신들과는 급이 다르다고 했다. 그러니 어린 K의 눈에 Y가 백마 탄 왕자로 보였던 건 어쩜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지금의 K라면 Y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왕자님은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인물이지 현실 속에는 없다는 걸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K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단번에 Y에게 빠져버렸다. 하지만 전형적인 나쁜 남자였던 Y는 마치 써 놓은 각본처럼 K의 마음을 요리했다. 만날 장소도, 먹을 음식의 종류도 자기 맘대로 정했고 함께 하는 시간도 자기 멋대로였다. 같이 있다 가도 뭔 가가 내키지 않으면 집에 가버리기 일쑤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런 식으로 Y는 여러 여자들에게 환심을 사고 그녀들의 감정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자기 멋대로 굴었다.   

  

            Y를 만나는 동안 K는 행복하지 않았다.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도 밥 한 끼를 같이 먹으면서도 뭔가 늘 불편했다. 한 번은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문자로 “만나고 싶어.”라고 보냈다. 그러자 돌아오는 답변은 “바빠. 아버지 공항에 모시러 가야 해.”였다. 그래서 “5분만이라도 만나.”라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어디 있냐고 물었고 K가 있는 곳으로 Y가 정말 왔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은 딱 두 마디뿐이었다. 화려하게 하고 다니던 K가 조금 얌전하게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나오자,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맘에 들어.” 하더니 “5분 지났다. 태워다 줄 테니까 가.” 하고 가버렸다. 너무 기가 막혔다. 5분 만나자고 했다고, 정말 5분을 만나다니. 그나마 이렇게 만나서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Y는 뭔가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속된 말로 잠수를 탔다. 연락을 안 하고 연락도 받지 않는 거다. 한 번은 만나자는 Y의 말에 신촌에 나갔다. 언제 잠시 연락을 안 했냐는 듯 Y는 K를 이끌고 닭 한 마리를 먹으러 갔다. Y는 K의 숟가락에 닭고기 살을 발라 얹어주고 밥을 손으로 떠먹여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달콤한 말들도 잊지 않았다. 식당에서 나와 걷는데, Y는 다정하게 K의 손을 꼭 잡았다. 미국에 놀러 갔다 올 건데 선물 뭐 갖고 쉽냐고 물어봤다. 수줍게 “향수” 라고 대답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그러나 멀리서 다가오는 K의 친구가 Y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면서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본 Y는 갑자기 격분을 해서는           


        “네 친구가 뭔데 날 저런 식으로 쳐다보는데!”               


라고 화를 내면서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다. K는 너무 놀라서 쫓아가봤지만 이미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 K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고, 평소 나쁜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K를 보자마자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낸 Y의 태도도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런 상황에서 달아나듯 사라져 버린 그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K는 Y에게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그렇게 잠적하듯 사라져 버린 Y가 다시 연락을 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였다.           


            “뭐 하고 있었어?”         

      

            뜬금없는 그의 말에 놀랐지만 한편으론 고마웠다. '죽지 않고 살아서 다시 연락했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Y의 일종의 작전이란 걸 왜 몰랐을까. 그 사이 Y는 예상되는 대로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있었다. K는 그 여자들의 변방에 있었다. Y의 입장에선 버리고 싶지 않은 여자지만 결혼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여자가 바로 K인 거다. K의 학벌도, 집안도, 모든 배경이 Y에게는 모자랐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Y를 떠날 수가 없었다.           


        “우리 술 한잔할까?”       

   

    Y는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K에게 대뜸 묻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랑 잤어?”

     “그런 거 왜 물어보세요?"

     “궁금해서. 솔직히 말해봐 같이 잤지?”

      “그래요. 왜요!”     


         갑자기 Y의 얼굴빛이 변하는 가 싶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소주를 연거푸 마셨다. K는 순간적으로 솔직히 말한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얼마 후, K는 Y와 같이 잠자리를 했다. 그와의 잠자리 또한 예상했던 대로였다. K의 기분 따위 상관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욕구만 채우면 그만이었다. K는 Y와 잠자리를 하던 날 밤, 몸이 많이 아팠다. 감정적으로 아무런 준비가 없이 이뤄진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K는 많이 울었다. 분명 내가 좋아하는 오빠인데 수치심마저 느꼈다. Y를 그만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날 밤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도 Y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갑자기 연락이 오면 거절하지 못하고 만났다.

      

            Y의 행동도 분명 문제가 있었다. K가 잠잠하면 Y는 K에 대해 알아보고 다녔다. 무얼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아봤다. 그리고 Y는 마치 스토커처럼 비로소 안심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Y가 자신의 뒤를 캐고 다닌다는 것이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Y와 함께 할 때면 가슴이 또 뛰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함께 있으면 불편하고 힘든데 또 돌아서면 그리워지는 건 무슨 연유일까? 자신에게 Y가 차갑게 구는 건 분명 그가 힘든 상황에서 뭔가 상처를 받아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따뜻하게 감싸주면 그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 거란 어리석은 착각에 빠져 Y와의 인연을 쉽게 끊지 못했다. 놀랍게도 이 악연은 무려 20여 년간 계속됐다.   

   

            그 사이 K의 감정은 사랑을 넘어 그냥 옛사랑에 대한 기억을 머금은 사랑과 우정, 그 중간 어딘가에 머물러버렸지만. 이렇듯 막상 만나면 불편하고 힘들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 아파하던 K의 마음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만들어 놓은 환상 속의 멋진 이상형을 그려 놓고 그 이상형에 상대를 끼워 맞춰서 사랑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막상 Y라는 실체는 내 상상 속 남자의 모습과는 괴리감이 있기 때문에 편안하고 행복한 감정보다 뭔가 불편하고 힘들다. K는 상대방이 내게 상처를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음속의 생채기는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언제나 아픈 쪽은 K다.      


             Y는 변한 적이 없었다. 변한 것은 K였다. 내 감정을 이해하고 상처를 이해할 때쯤 K는 더 이상 순수하고 풋풋한 나이가 아니었다. 불편하고 아팠던 사랑의 실체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Y의 모습이 달라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예전보다 더 낯설어졌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Y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웠다. K는 그 순간 깨달았다. 왕자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다는 것을. 내가 찾던 왕자님은 이미 오래전에 퇴근했다. 있지도 않은 왕자님을 그 자리에서 기다려왔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기 위해, 이 무모한 기다림을 무려 10년이나 했다.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또다시 Y는 K를 흔들었다. 하지만 K는 마음을 다졌다.      

    

         “되돌아가지 말자. 이제 혼자 앞으로 가자. 더 이상 왕자님을 기다리지 말자.”  

         

            K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게 Y를 떠나보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의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많이 하지 않는다. 그 사람과 함께 일 때 내 감정은 어떤지,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를 통해 어떤 마음을 혹은 어떤 기쁨을 얻었는지, 그 순간에 내 마음은 편안했는지 아니면 불편했는지, 어땠는지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 필요하다. 내 마음을 이해하고 난 뒤에 비로소 상대의 마음을 읽는 거다. 이렇게 순서를 바꾸고 나서 시작한다면 불편한 사랑을 억지로 끌고 가서 혼자 아프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내 곁을 떠날 때, 슬픔은 내 곁에 머물고, 행복은 그대와 함께 사라지네." <셰익스피어의 '헛소동' 1막 1 씬 중에서>               

 

        이별의 시간은 사랑했을 때의 시간보다 더디게 흘러간다. 때로는 시간이 멈추기도 한다. 그리움 때문에, 원망 때문에, 상처 때문에. 각기 다른 이유로 이별은 지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는 이제 붙잡을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갔지만 마음의 줄기는 아직 서로에게 뻗어 있음을 알았다. K는 이것을 ‘슬픈 이별’이라고 얘기한다. 같은 곳을 바라본 적 없었던 지난 시간들은 아픔이 되어 가슴에 꽂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별이 그렇듯,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 슬픔도 머물다가 결국엔 지나갈 것을 안다. Y는 오랜 시간을 거쳐 K를 떠나갔다. 그리고 그녀도 더는 Y를 생각하며 울지 않았다. 층층이 쌓여있던 이별은 한꺼번에 마음에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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