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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장 Jun 06. 2020

죽어도 못 보내

그날 당신의 눈빛이 어떠했다고 할까요? 끝없이 높고 아득한 하늘 같기도 하고, 깊고 고요한 강물 같기도 했습니다. 한없이 커다랗고 부드럽고 흰 목화솜인 듯도 했습니다. 갈 곳 없는 티끌이 날아와 붙는 것도, 함부로 버려진 구정물이 스며들어 오는 것도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다는 듯 담담하고 고요한 눈빛이었습니다. p33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퇴계 이황,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두 번째 부인.

그녀가 품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이렇게나 한결같았다.

큰 나무가 되어 그녀를 지켜주던 모습.

한참을 헤매다 돌아가도 늘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누구나 상대에게 바라는 모습이 아닐까?

     

며칠 전 남편과 대화 중 “내가 죽을 때까지 너를 미워할까 봐 지금이라도 이야기해야겠다.”라며 시작한 말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다 맞는 말이지만 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의 입을 통해 듣는 나의 모자란 점들은 참 가슴이 아팠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동들과 기억도 나지 않는 말들을 남편은 꼭 끌어안고 나를 볼 때마다 아파하고 또 아파했으리라. 그의 가슴에 늘 무거운 돌덩이 하나 얹어져 있는 것을 결혼 17년 동안 서서히 잊고 살았나 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아직도 남편을 볼 때면 자꾸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말 수도 줄이고 꼭 필요한 말들만 하고 있다. 참 속 좁은 여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요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 아침 라디오에서 “같은 말에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의 높낮이는 다르다.”라고 하는데 꼭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아서 또 온종일 시무룩해져 있었다. 몇 년을 묵혀서 털어놓은 남편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편과 나의 나이는 7살 차이. 할머니와 살아 애어른 소리 많이 듣던 나지만 그 차이는 쉽게 넘지 못하는 허들 같았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생각했는데 나와 남편의 무게는 한참이나 달랐다. 인생에서 크나큰 일들을 겪을 때마다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즐거운 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는 나와달리 과거를 하나하나 복기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하는 남편을 나는 종종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 나는 그에게 너무나 가벼운 여자였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


남편과 만나기 전의 남편을 알 수 없고 그가 겪었던 아픔들을 완벽히 공감할 수없기에 이해가 아닌 그저 받아들임으로 남편의 세계를 지켜줘야 한다. 남편과 나의 교집합을 자꾸만 키우려고 했던 것이 나의 크나큰 실수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둘 다 힘들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B612에서 살고 있는데 두 행성이 충돌하면 부서지기밖에 더 하겠는가.


나도 권 씨 부인처럼 처음 남편에게 느낀 감정이 혼백이 되어서도 생생하게 기억 날 것이다.

깊고 따뜻한 음성,

매서운 눈매지만 나를 바라볼 때면

한없이 너그러워졌던 서른 살의 그.


언제든 그 나무에 기대어 쉬어가려면

내 행성의 장미 가꾸듯 사랑 주고 물 주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꺾으면 안 되겠지.

그러다 보면 남편도 권 씨 부인처럼

나를 향한 마음이

죽어서도 못 보낼 만큼 될까.



#안소영 #당신에게로 #정약용 #다산 #부인 #혼 #한풀이 #독서일기 #존경 #남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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