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어본 하루끼의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 당연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담겨 있으니 책을 읽으실 분은 다음에 읽어주셔요 ^^
* 그리고, 이 글은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의 이별을 겪은 남자의 입장에서 <기사단장 죽이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써 본 글입니다. (옛날의 나를 떠올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무려 1천 페이지나 되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었습니다. 난 한번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학 1학년때 <상실의 시대>를 읽기 시작했다가 중간에 포기했던 안좋은 기억만 갖고 있지요.
그러면, 나는 왜 이 책을 집어들었을까요?
'상실'을 치유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하루키하면 '상실'이니까요. 나는 이 책에서 하루키의 처방전을 받아 '상실'에서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내 상실이 무엇이냐고요? 사람 관계에서의 상실입니다. 즉, 이별이지요.
과연 나는 '상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치유받았을까요?
1천 페이지 중 600페이지쯤 읽었을 때, 이런 질문을 나에게 던졌습니다.
이 소설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음.. 십중팔구 주인공 남자와 유즈 (별거중인 와이프)가 재결합할 것 같았습니다. 그것 말고 이 소설의 결말이 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주인공의 재결합이라면 너무 뻔하잖아요.
난 그 순간 책을 '퍽'하고 덮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1천 페이지 소설의 결말이 고작 이거냐고 말이지요. 까놓고 말하면, 권태기에 빠진 부부가 결별했다가 다시 결합한다는 뻔한 스토리를 읽으려고 1천 페이지를 넘겨야 하냔 말이지요..
게다가 주인공은 재결합해도, 내 이별은 재결합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났습니다. 상실의 극복이 재결합이라면, 그것도 상실의 치유라고 할 수 있는거냐는 생각도 들었구요.
아무리 결별하고 재결합하는 과정에서 훌륭한 메시지를 준다고 해도, 난 그 결말을 받아들이기 싫었어요.
씨발..
나는 재결합 못하는 상실에 빠져있단 말이야!!!
뻔한 결말이 예상되었지만, 그래도 1천 페이지를 넘긴 고생을 보상받기 위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주인공은 어떤 마법을 부렸기에 재결합할 수 있었을까?
1) 주인공은 이별을 통보받는 순간,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그냥 떠났다!
난 정말 이해가 안되었어요. 주인공이 이혼 통보를 받고 한 행동이 말이지요. 상식적으로 그런 상황이면,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쌍소리 나와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주인공은 어떤 분노도 느끼지 않는 듯 바로 짐을 싸서 집을 나와 여행을 가버립니다. 목적지도 없는 여행을 말이지요.
여행을 마친 후에도 친구의 아버지 집에 콕 박혀 지내지요. 그냥 무덤덤한 감정 상태로 말이지요. 무기력일 수도 있고요. 그러다 가끔씩 자기에게도 '분노'가 있다고 한 마디씩 하죠.
음...
이게 '예상치 못한 이별'에 대처하는 이상적인 방법인 것일까요? 대부분은 구질구질하게 상대방에게 분노하고, 왜 그랬냐고 이유를 캐고, 다시 시작해 보자고 애걸하는데 말이지요. 이 소설의 결말에 비추어보면, 주인공의 '분노하지 않고 그냥 떠나기'는 효과 만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분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둘 간에 갈등이 발행하지 않았거든요. 솔직히 그 덕에 나중에 화해하고 재결합할 수 있는 감정적 기반이 만들어진 것 아니겠어요?
내가 쫌생이였군요. ㅋㅋㅋ 오래된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처럼, 나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지랄하고 분노했을텐데 말이지요. 주인공이 이렇게 아무런 분노도 표출하지 않고 그냥 떠난 것은 '고도의 밀당 전략'이었을까요?
2) '현실인정'과 '현실부정' 사이...
주인공은 이별 통보를 듣는 그 순간, 즉시 '현실인정'을 한 셈입니다. 상실의 순간에 발생하는 '분노'는 '현실부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니까요. 주인공은 좋게 말하면 쿨하게 현실인정을 하고 떠난 셈이네요.
그런데, 인생의 지혜를 다루는 모든 책에서 '현실인정'을 강조합니다. 변화를 맞이하면 일단 '현실인정'하라고 하지요. 그 이유를 알겠네요. '현실인정'해야 next가 가능하구요. '현실부정'하고 '분노'해봐야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잖아요. next 찬스만 날리는 셈이죠.
1) 무엇을 죽여야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을 읽다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을 꼽자면, 이데아의 현신인 '기사단장'이 '나를 죽여라'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기사단장'은 현실의 존재도 아닌데, 그를 죽인다는 해서 도대체 무엇이 바뀐다는 말입니까? '기사단장'을 죽여야 '마리에'를 살릴 수 있다니..
'하나를 죽여야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그러면, 나는 무엇을 죽여야할까요? 내 '상실'에서 탈출하려면 말이지요. 나에게 '이데아=기사단장'은 무엇일까요? 이데아는 '관념'이라고 소설에서 여러번 반복해서 말합니다. '관념'은 내 생각이죠. 아마도 '관념'이 '분노' 아닐까요? 지금 나에게 벌어진 '변화 or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생각 말이죠. 상대방이 나쁘다거나, 내가 운이 없다거나, 세상이 XX 같다거나 하는 생각 말이죠.
그 생각을 죽이면 어떻게 되죠? 이런 생각이 드네요. '생각'은 '과거'잖아요.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한 '생각'이니까요. 그런데, 흔한 말로 '과거'는 바꿀 수 없잖아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현재'뿐이고요. '이데아'를 죽인다는 것은 '과거'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의미 아닐까요? '현실인정'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2) 메타포의 동굴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데아=관념=과거 사건'을 죽여서 '현실인정'을 했다고 칩시다. 그 다음에 주인공이 겪는 것은 '메타포의 동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메타포의 동굴은 비현실의 세상입니다. 내 마음과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는 세계 말이지요.
거기서 그는 '이중 메타포'의 공포를 이겨냅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소설에서 이중 메타포를 '올바른 생각을 하나하나 먹어치우는' 존재라고 표현하지요. 내 생각에는 '공포'인 것 같아요. 현실에 실재하지 않는데, 내 마음 속에 기생하는 거짓 공포이지요. 그 공포 때문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분노같은 과거의 감정에 붙들려 어둠 속에 갖혀 버리고 마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내가 '변화=이별' 후에 느끼는 거의 모든 감정은 '이중 메타포'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요? 실재하지 않고 내 마음속에 기생하는 거짓 공포 말입니다. 나는 그 거짓 공포에 둘둘 감겨서 현실 세계로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인가요?
1) "그래도 컵에는 아직 물이 16분의 1이나 남았어."
소설에 이 대사가 두세번 나옵니다. 난 이 대사가 참 뜬금없다고 생각했어요. 흔하디 흔한 전형적인 자기계발서 문구잖아요. 문학의 대가 하루키 선생님이 할만한 메시지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 대사가 맘에 드네요. 이 대사 속에는 아래와 같은 '마음 로직'이 담겨 있는 것 아닐가요?
1단계 : '상실'을 만났을 때 '분노'를 표출하지마!
2단계 : 왜? 아직 물이 16분의 1이나 남아 있으니까. 희망을 키우려는 사람에게 '분노'는 독약 그 자체야.
3단계 : 그 상태에서 '내 상상 속 세계'의 '이중 메타포'를 이겨내
2) 타인의 초상화를 나만의 방식으로 그려봐!
주인공은 전 부인 유즈와 재결합하면서 초상화 그리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런데, 결별 전과 재결합 이후의 초상화를 대하는 주인공의 자세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결별 전의 그는 초상화 그리기를 '생계 수단' 정도로만 치부합니다. '나는 다른 나만의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현실적인 이유로 '타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거야.'라는 생각 말이죠.
그런데, 재결합 이후의 그는 '초상화'를 '자기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기사단장'이 말하기를, 자기를 죽이고 메타포의 동굴을 통과하면 '나만의 것'을 찾을 수 있다고 했죠. 이제 주인공은 초상화를 '타인의 그림'이 아니라, '자기 그림'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것도 '현실인정'의 하나일까요?
나는 솔직히 이 소설에서 감동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무덥고 습한 여름날씨와 1천 페이지의 영향 때문일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나의 기사단장'을 찾아 죽이고 '메타포의 동굴'에서 헤매다 탈출하고 싶어요. 나도 나만의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을 그려볼려고요..
왜냐라면, 나는 아직 상실의 마음지옥에서 탈출 못했거든요.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