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하는 균열이 '나'를 찾게 합니다.

부서진 나를 다시 빚어내기

by 하얀밤

언쟁 끝에 남편이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릴 때, 다른 부원보다 훨씬 품이 많이 갔던 부원이 갑자기 나에게 부족한 부장이라고 할 때, "쨍"하고 균열이 갑니다.


조심스럽게 한 겹 한 겹 덧칠해온 제 세상에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번개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개처럼 한 순간에 금이 갑니다. 탱글탱글 색도 예쁜 m&m 초콜릿 한 알같던 세상이 누가 힘껏 누른 것처럼 보기 싫게 찌그러지고,

그제야 안에 있던 초콜릿이 드러납니다.

제 실체가 드러납니다.


균열이 가는 건 참 아픈 일입니다. 덧칠을 정성껏 해왔기에 더 그렇습니다. 싫어도 참고, 아파도 일어나서 나만의 세상을 만들 거라고, 어른스럽게 살아볼 거라고 붓질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내 노력을, 내 수고를 몰라주는 그들이 원망스럽습니다. '원망'이 균열에 따르는 1차 감정입니다.


1차 감정에 압도되면 온통 머릿속에 '그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장면이 원치 않게 재생될 때마다 균열의 틈이 더 벌어집니다. '왜 그랬지,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그렇게 바보같이 있었을까, 그 사람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같은 생각이 회오리바람처럼 머리를 휩쓸고 지나가며 이미 찌그러지기 시작한 초콜릿을 더 눌러댑니다. 초콜릿 속살이 틈새로 빠져나오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초콜릿의 모양을 유지하는 게 힘들다고 느낄 때 즈음, 불현듯 '통찰'이 찾아옵니다.


"아, 내가 나를 잃어가고 있구나."

하고요.

균열은 내가 나로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꾸준히 인지하고 그것을 생활에 녹여내는 것을 게을리했을 때, '그들'은 균열을 가져옵니다. 아니, 제가 균열을 '허락합니다'. 남 탓을 하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에 주어를 '제가'로 바꿔봅니다. 이것이 모든 통찰의 시작임을 아니까요. 모든 것은 제가 하기에 달렸습니다.


균열의 모양을 찬찬히 관찰해봅니다. 타인이 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하고, 스스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겁을 먹고, 필요 이상으로 타인을 의식하며 잘해주려 하고, 한 발 물러나서 관망해야 하는 상황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는, 그런 제 자신이 보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해야 할 일은 부족해 보이는 자신을 탓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자신을 안아줘야 합니다.


나를 안아주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방탄소년단의 <Answer: Love Myself>의 가사가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자.
네가 내린 잣대들은 너에게 더 엄격하단 걸.


균열을 감지하는 고통이 제 세상의 실체를 보게 하고,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 패턴은 균열이 생길 때마다 반복됩니다. 균열을 발생시킬 수 있는 외부의 힘은 언제든, 어디서든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내가 나로서 살 때, 조금 더 빠르게 회복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다시 제 초콜릿을 빚어봅니다.

기존의 것보다 조금 더 단단하게.

동그란 모양을 회복해가는 초콜릿에 제 색깔을 칠해봅니다.

기존의 것보다 더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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