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성'은 사랑의 중요한 요소로 꼽히기는 하지요. 적극성은 오늘 고백하리라는 풋풋한 용기에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타국으로 건너가 봉사하는 모습에서까지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적극적인 면만 강조되어서는 사랑이 어려운 것으로 비치기 쉽습니다. 쉽사리 사랑할 용기도 나지 않고 사랑받은 적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유명한 노래 가사이기도하고 성경구절이기도 합니다. 참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것입니다. 행동이라기보단 선택에 가깝지 않을까요? 수동적인 선택으로도 사랑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보통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로 '상대방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것을 꼽곤 합니다. 그런데 참는 것은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이해하고 수용한 것을 참는다고 표현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조건이 없이 참아주는 것입니다.
아, 한방 날리기 전에 참아보겠다는 것도 여기선 들어맞지 않습니다. '오래'라는 건 '끝까지' 혹은 '영원히'랑 맥락을 같이 하거든요.
참아주기로 결정하는 것만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비(非) 적극적인 모습은 사랑에 대한 문턱을 많이 낮춰주었습니다. 사랑할 사람이 참 많더군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답답하고 공격을 당하는 상황일수록 사랑을 실천할 조건이 생긴다는 아이러니함입니다.
어리광 부린 적이 있다면, 부끄러운 모습을 누군가 모른척해준 적이 있다면, 답답한 모습을 기다려준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사랑받은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사랑했고, 사랑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라고 해서 오래 참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오래 참으면 그것도 사랑이라는 뜻이지요. 참지 못해도 걱정 마세요.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