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라 & 레슬리 / 칠레 산티아고 / 기계 엔지니어 & 케익 디자이너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뤄지겠지."
긴 여행의 마지막 3박 4일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보냈다. 나는 할머니댁에 놀러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먹어도 먹어도 끝없는 음식, 아낌없는 보살핌과 사랑. 그곳은 '칠레 언니들'네 집이었다.
과테말라 티칼 국립공원(마야문명 유적지) 근처, 플로레스에서 처음 만났던 칠레 자매는 이 여행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함께했던 동행이다. 과테말라, 벨리즈를 거쳐 다시 멕시코까지. 버스, 벤, 페리, 렌트카까지 타고 온갖 동고동락을 함께 했다.
서로 같은 듯 다른 세 살 터울의 자매. 마르셀라와 레슬리. 마르셀라는 성숙한 언니미소로 우리의 수다를 들어주고, 레슬리는 넘치는 텐션으로 매번 짜릿한 제안을 한다. 둘다 흥이 넘치고, 고대 마야문명 유적 매니아에, 하루의 끝은 항상 맥주 한 캔으로 마치는 낭만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식성이나 여행 스타일이 비슷한 나를 막내동생으로 삼겠다며 함께 여행하자고 제안했고, 나도 마침 적적하던 차에 그 여정에 뛰어들었다.
당찬 두 자매에겐 소소히 이루고 싶은 소망들이 있다. 하지만 당장 다음주에 다시 출근을 해야 하고, 출근길은 멀기만 하고, 상사는 도무지 녹록치가 않다. 그래도 꿈은 꿈이니까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미리 후일담을 밝히자면, 6년이 지난 지금 두 자매는 내게 들려줬던 꿈을 이미 이룬 상태다.
마르셀라, 레슬리, 그리고 나. 세 자매는 거대한 피라미드 위에 앉아있다. 사방으로 어느 쪽을 보아도 나무가 빼곡한 지평선이 보인다. 숲으로 가득 찬 공간. 눈으로 닿는 저 멀리, 그보다 더 멀리. 가늠할 수 있는 끝까지 보인다. 푸르른 녹음과 싱그러움, 생명으로 넘실대는 세계가 발 아래 들어차 있다. 중미에서 가장 큰 정글, 그 한 가운데 오롯이 존재하는 왕국. 거대한 마야 문명의 유적지, 멕시코의 깔락물(Calakmul)이다.
바람이 넘실 불어와서 두 팔이 살며시 들어올려진다. 바람이 온 몸을 감싸오면서 가볍게 걸친 옷이 휘날리면 나조차도 이파리를 가진 나무가 된 기분이 든다. 하얀 나비가 주변을 팔랑팔랑 맴돌고 까맣고 큰 새가 흰 배를 내보이며 먼 하늘을 빙글빙글 돈다. 이 커다란 왕국의 주인이 된 기분을 느끼며 아래를 내려다본다.
깔락물에서부터 현대의 문명이 있는 시내로 돌아나오는데만 차로 3시간이 넘게 걸렸다. 홍학처럼 생겼지만 머리가 파란 새, 너구리 같은 것들이 문득 튀어나오곤 했다. 정글을 거의 다 벗어나서야 인터넷이 다시 터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누구에게 설명해줘도 믿지 못할 비밀 공간에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다.
또 다른 말도 안되는 경험은 이름도 생소한 벨리즈, 키코커 섬. 벨리즈는 과테말라 동쪽에 카리브해를 맞대고 위치한 아주 작은 나라다. 인구는 약 40만 정도. 이 나라는 키코커라는 작은 섬으로 유명하다. 수도인 벨리즈 시티에서 배를 타고 45분쯤 달리면 키코커 섬에 도착한다. 아직 배가 닿기도 전에 카리브해 한 복판의 키코커 섬의 청옥색 해변에 마음을 뺏긴다.
키코커 섬은 크지 않아서 마냥 산책하기도 좋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스노클링. 총 3번의 스노클링을 하는 투어를 신청했다. 첫번째는 해초와 특이한 바위, 물고기를 구경하는 시간. 머리를 물 속으로 담그자 얼음처럼 찬 물결이 등을 타고 흐르면서 싱그러운 한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두번째는 상어와 수영하기. 동그란 머리에 투박한 눈을 가진 크지 않은 상어가 우리 주변을 헤엄치며 먹이를 먹는다. 가오리도 해저를 샅샅이 파헤치는 탐사선처럼 아주 천천히 바닥을 훑고 지나간다. 세번째는 산호초와 물고기의 이름을 배우는 시간이다. 우리는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 아이처럼 가이드가 불러주는 이름들을 또박또박 되뇌인다.
그런데 사실 스노클링은 거북이를 보고 싶어서 신청한 거였다. 칠레 자매들도 알고 있었다.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는지, 내게 와서 다른 기회가 있을 거라며 위로해준다. 마지막 스노클링이 끝나고 다시 육지로 향하고 있는데 선장님이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짧게 외친다. Tortuga! Turtle! (거북이!!!)
배는 삽시간에 웅성웅성. 너나할 것 없이 풍덩풍덩 물 속으로 뛰어든다. 정말로 거북이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마치 이상해씨처럼) 풀빛의 몸과 그것보다 맑은 색의 등껍질을 가진 거북이었다. 거북은 해초를 와앙 하고 뜯어물더니 오물오물 씹고, 이내 또 한 입 크게 베어문다. 거북이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동물이라니. 강아지 고양이랑도 겨뤄볼 수 있겠다 싶었다. 밥을 다 먹은 거북은 긴 팔로 날갯짓 하며 바다 속을 날아간다.
그렇게 마지막 스노클링이 끝나고 칠레 언니들에게 가득 축하를 받는다.
"거북이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드디어 봤네. 축하해."
이런 날은 그냥 보낼 수 없지, 오늘 같은 밤은 파티를 해야 한다며 우리 셋은 또 맥주를 마신다. 물놀이 후의 맥주는 눈물나게 맛있는 법이다. 하지만 거북이는 핑계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매일 밤마다 맥주잔을 부딪히며 하루를 끝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이틀이었던 동행이 닷새가 되고, 일주일이 되며 점점 늘어났던 것이다.
두 자매와 인터뷰를 한 것은 긴 동행 여정의 마지막 날. 멕시코 해안가의 마야 유적지, 툴룸(Tulum)에서였다. 툴룸은 그 전의 마야 유적지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느낌을 주는 돌 유적이 푸른 풀밭과 잘 어울리는 곳이다. 무엇보다 마야 유적은 죄다 정글에 있는 줄 알았는데, 바다냄새가 나는 마야 도시는 처음이다. 발목에 물기가 맺혀있고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에 소금기가 맴도는 마야인을 상상해본다. 숲과 바다에서 온 두 마야인이 인사를 나누고 각자 가져온 선물을 주고받는 모습이 머릿 속에 그려져서 자꾸만 웃게 된다.
툴룸 유적을 다 보고 온 우리는 거나하게 저녁을 먹고 식당 테이블에서 기분좋은 그대로 인터뷰를 시작한다. 이미 해가 저물어 거리에 노랗게 조명이 들어오는 참이다.
큰언니 마르셀라가 먼저 가까운 꿈, 그리고 먼 꿈을 하나씩 들려준다.
"나는 조만간 언어를 배울 거야. 영어랑 이탈리아어. 그래서 이 언어를 쓸 수 있는 곳에 가서 살아보고 싶어. 그리고 먼 꿈으로는 커다란 땅을 사서 부모님과 동생이랑 같은 곳에 살며 정착하는 거야."
왜 언어를 배우고 싶은지 물었더니 현실적인 답변이 먼저 나온다.
"언어를 할 줄 알아야 직업의 폭이 넓어지거든. 나는 기계공학을 전공해서 기계설비를 설계하거나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칠레 밖에 나가서 일해보고 싶은 맘이 커."
"왜 나가보고 싶은 거야?"
"그냥, 궁금하잖아. 나는 호기심이 많거든."
직업 외로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더니 마르셀라와 레슬리가 입을 모아 대답한다.
"여행하고 사람 만나는 거!!!"
이런 걸 보면 죽이 참 잘맞는 자매다.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가보고싶다며 눈을 반짝인다.
"그렇지만 우린 백만장자가 아니니까. 일해서 돈 벌고, 여행가서 돈 쓰고, 이런 반복이지 뭐. 하하."
마르셀라의 말. 결국 장애물은 돌고돌아 또 돈이다. 지금 하는 일은 미래를 위한 포석이고 준비과정이다. 동생 레슬리는 자신만의 회사를 차리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
"나는 나중에 내 회사를 차리려고 지금 케익 가게에서 케익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어. 하지만 언젠가는 나만의 가게를 열고 싶어. 케익과 타르트, 초콜렛 같은 것을 파는 디저트 가게 말이야! 아니면 식당도 괜찮을 것 같고. 그리고 언젠가는 호스텔도 열 수 있다면 좋겠네"
옆에서 듣던 마르셀라가 거든다.
"호스텔 좋다. 여행객들이 놀러오면 다른 문화를 많이 접해볼 수 있을 거 아냐. 물론 돈도 많이 벌고. 좋은데?"
하지만 미래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결코 녹록치만은 않다. 레슬리는 일할 때 자신의 삶이 없는 것 같다며 마음 속에 담아뒀던 얘기를 꺼낸다.
"내 시간이 좀 많았으면 좋겠어. 매일매일, 하루종일 일하는 거 말고. 칠레는 주당 45시간을 일하는데 난 통근시간이 편도 두 시간 걸리거든. 그럼 하루에 네 시간이잖아? 일 마치고 퇴근하면 내 시간은 하나도 없는 거야. 그런데도 이번 여행 오려고 일주일 휴가 쓴다고 말했을 때 사장한테 한 소리 들었다니까."
원래 법적으로 1년에 3주정도 휴가를 주도록 되어있지만, 어떤 회사인지 또는 어떤 대표인지에 따라 휴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한테 늘 공격적이야. 나는 그게 너무 높은 노동강도와 긴 노동시간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칠레에서는. 하루 9시간 내내 상사한테 시달리고, 모든 일을 빨리빨리 처리해야 하고, 출퇴근 길도 힘들고... 그래서 모두가 예민해지는 거지. 평온하게 생각을 정리하거나 행복을 느낄 겨를이 없는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해야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
마르셀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 의식이 큰지, 옆에서 함께 동조한다.
"일을 하다 보면 우리가 스스로 삶에 대한 컨트롤을 잃어버리게 되기가 쉬운 것 같아. 변화가 필요하지."
마르셀라는 사회 계급도, 빈부 격차도, 인종 차별도 없는 세상이 온다면 유토피아와 가깝지 않겠냐고 한다.
"칠레에선 남미 대륙에 살던 원주민에 대한 차별이 심각해. 특히 칠레 남부에서는 더더욱. 엘리트 계층은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 정말 중요한 문제야. 빈부격차도 점점 심해져서 가난한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극소수의 부자들은 아직도 태평하게 부를 누리고 있어"
실제로 칠레의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런 물가를 감당하지 못하는 빈곤층들은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조용하게 가라앉고 있다.
레슬리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환경오염을 없애고 싶다고 말한다.
"칠레에는 바다가 정말 많아. 지도 보면 알지? 그런데 사람들은 바다가 이쁘다고 생각하고 그 뿐이야. 아무도 자연에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 버려지고 관리되지 않은 더러운 해변도 많고. 다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기업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연쯤은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정부도 눈 감아 주고 있잖아. 결국에는 사람 먹을 물도 하나 없게 될 거고, 정말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야."
인터뷰를 마치자 두 자매가 부스럭 거리며 짐에서 뭔가를 꺼낸다.
"선물이야. 그동안 함께 여행해서 정말로 즐거웠어."
선물을 챙겨 주다니. 얄궂게도 나는 빈손이다. 열어보니 거북이 모양 마그넷. 우리가 함께 벨리즈 카리브해에 둥둥 떠서 스노클링 하다가 만난 거북이를 떠올린다. 내가 거북이를 좋아한다는 걸 기억해준 게 퍽 고마웠다.
"마지막 여행지가 칠레 산티아고라고 했지. 꼭 우리 집으로 와. 그때 다시 만나자."
그로부터 100여일 후, 모든 여행을 마치고 칠레 산티아고에 도착한 나는 자매의 부모님과 함께 성대한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셀라는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떠난 후였다. 영어를 배워서 외국에 살고 싶다더니, 꿈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산티아고에 머무는 내내 레슬리와 여행 추억을 되새겼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레슬리와 그 부모님은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주었다. 유리 너머로 내 모습이 영영 안보일 때까지 거기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6년이 지나고 2022년. 레슬리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며 안부를 묻자 힘들지만 재밌어, 라는 답변이 온다.
"나 결국 내 가게를 차렸거든. 아직은 작은 가게긴 하지만."
견과류와 젤리 같은 간식과, 케익을 파는 귀여운 가게다. 정말 꿈을 이뤘구나. 이들이 나의 남미 언니라는 게, 내가 이들의 막내동생이라는 게 물씬 자랑스러웠다. 사람들을 붙잡고 꿈 같은 걸 묻고 다니던 시간이 영 허무맹랑한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남몰래 뿌듯해졌다. 마르셀라도 여전히 칠레 밖의 모험을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 다시 6년이 지나면 이들의 새로운 꿈들도 또 이뤄질 것이다. 계속해서 꿈꾸기만 한다면 분명히.
- Santiago de Chile, Chile / Florence, Guatemala / Calakmul, Mexico / Caye Caulker, Belize
- 인터뷰 날짜 : 2015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