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와 유화의 새로운 도덕성

by 그레나딘


광고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의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고운 피부와 빛나는 머릿결을 자랑합니다. 그녀들의 모습에서는 나이를 불문하고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지요. 샴푸 광고에서는 일명 미역머리를 자랑하며 반짝이는 헤어를 선보이지요. 화장품의 수많은 단계별 제품을 단 몇 초 만에 보여주면서도 미세한 바늘구멍 하나 없는 랩을 씌운 듯 팽팽한 피부를 자랑합니다. 정말 저 제품을 쓰면 속까지 차올라 나의 피부도 저렇게 재탄생할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해당 제품을 검색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광고의 힘입니다.


‘광고의 힘’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광고는 ‘지금’이라는 현재성에 기인하는 듯 보이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안겨준다는 무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더불어 현재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을 시각적으로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여신과 같은 외모의 연예인들이겠지요. 사실은 절대적으로 닮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제품을 사용하면 닮아질 수 있을 것 같은 바로 그 지점이 광고의 절대적 무기입니다.

(이미지 출처: 매경이코노미, 2017.01.06/http://news.mk.co.kr/v2/economy/view.php?year=2017&no=14748)


그 절대적 무기를 존 버거(John Peter Berger)는 글래머(glamour)라 말합니다. 그의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에서는 ‘매력’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우리를 설득하는 매력을 제조해내는 과정이 바로 광고라고 그는 말합니다. 즉, 광고는 변화된 사람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이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희망을 안겨준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출로 인해 당장 가난해지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부유해질 수 있다는 환상적이며 새로운 도덕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도덕성이란 지출에 따른 가난이 결국은 외부인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으며 개인의 행복, 즉 매력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그림에서는 이런 도덕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을까요? 매우 다양한 층위의 논의가 가능하겠습니다. ‘이상적 관객’이 늘 남성으로 상정되어 있던 여성의 이미지는 특정 계층만 소유할 수 있던 유화의 문화가 지닌 시선의 폭력성을 기준으로 ‘도덕’에 대해 논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선망의 대상’과 그것이 ‘매력’으로 작동하는 데 보다 초점을 두려 합니다. 글래머가 다수의 사람에게 선망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합의를 필요로 합니다. 특정 계층에게만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광고로써 효과는 미미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공통된 정서가 유지되어야 개인의 매력이 일반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분위기를 뿜어내기 위한 노력이 ‘유행’이나 올해의 색 등을 만드는 것이겠지요.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 이미지 일부 확대.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면, 유화의 소유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종의 도덕성을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했지요. 신고전주의 양식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겠습니다. 신고전주의에서 ‘선망의 대상’은 고대 그리스의 선각자였습니다.


조금 새로운 방식에서 유화가 지닌 ‘선망의 대상’으로서의 도덕성을 얘기해보겠습니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은 중앙의 해골 그림으로 인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대사들의 장신구와 주변을 자세히 보면 청담 며느리 뺨치는 수준입니다. 존 버거는 이 그림의 화려한 모피와 모자이크, 보석과 카펫, 가죽 등이 화가에 의해 정교하게 묘사되어 그림을 통해 새로운 부를 찬양했다고 말합니다. 그림에 그것을 재현하여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탐나고 매력적인 물건인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아드리안 부라우어, <쓴 술>, 1638. /<웃긴 표정을 만드는 청년>, 1635./ <담배를 피우는 사람>, 1635~1636.

이와는 정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아드리안 부라우어(Adriaen Brouwer)는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입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장르화로 불리는데요. 선술집의 풍경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새롭게 성장한 부르주아 계층이 많이 구입했던 유화가 바로 장르화입니다. 기존의 유화와 다르게 고귀하게 취급되지 않았던 대상들에 대한 관심을 표했던 미술이 장르화입니다. 그렇다면 선술집에서의 풍경이 어떤 ‘선망의 대상’과 ‘도덕성’에 관련이 있을까요?

새롭게 성장한 부르주아 계급 역시 ‘돈’에 대한 숭배가 확실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이 단단했지요. 그리고 일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들은 어떠한 것도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과, 새로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기 위한 계층 분류가 시급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저속한’ 내용을 담은 유화를 구입하는 것은 금전적 성공에 따른 보상을 확인받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자신이 일한 대가와 사회적 성공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도덕성을 긍정했기 때문에 장르화를 선호한 것입니다.


광고와 이 같은 유화가 지닌 공통점이라면 ‘선망의 대상’이나 시대의 ‘도덕성’을 제시한다는 점이겠지요. 물론, 자신의 권력과 위치의 과시와 아직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을 안겨준다는 극단적인 차이가 있지만요. 광고가 제시하는 순간의 가난이 선망의 시선에 따른 또 다른 부를 안겨줄 것이라는 환상, 그 새로운 도덕성이 지닌 무서운 힘을 인지한다면 현명한 소비와 광고의 이면을 보는 제3의 눈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뇌는 그것이 옳다고 믿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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