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숙면의 위대함과 죽음을 택한 욕망

by 그레나딘

이번 글은 미술을 연구하며 지내는 제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잘 드러나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 광고, 심지어 뉴스 등을 보다가도 어느 한 작품이 겹쳐지는 순간이 있는데요, 시몬스(Simmons) 광고가 오늘의 이야기 연결 고리 입니다.

2020-04-04 (2).png 2017년 시몬스(Simmons)침대의 새로운 캠패인, '숙면이 가진 위대한 힘'의 세번째 에피소드 중 일부화면.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침대 회사는 2017년 ‘숙면이 가진 위대한 힘’이라는 새로운 광고 캠페인을 공개합니다. 감각적인 '혼네(Honne)'의 음악을 바탕으로 인테리어와 패션 어느 하나 빈 틈이 없는 명품 감성을 뿜어내는 이 광고는 지금까지 총 세 개의 에피소드가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고는 벤자민 에이덤(Benjamin Eidem)을 시작으로 아네타 파약(Aneta Pajak) 그리고 션 오프라이(Sean O’pry)등을 포함하여 당대 핫 오브 핫한 모델 섭외에 자금을 아끼지 않았으며 등장 소품 역시 최고급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내용적인 측면에 있어 자극적인 요소들이 다소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숙면’의 ‘힘’이 뿐만 아니라 ‘욕망’과 ‘쾌락’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물론 광고의 목적이 인간의 욕구를 자극해서 소비로 이어지게 하는 데 있기는 합니다.


세 에피소드는 각각 다르지만 같은 형식을 유지합니다. 모두 배경의 어두운 색과 톤을 유지하고, 주인공이 침대에 앉은 자세에서 뒤로 몸을 눕히는 동안 무시무시했던 그의 하루 일과가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한 순간에 펼쳐지는 스토리를 유지합니다. 한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고 주인공이 그야말로 아가처럼 자는 순간을 엔딩컷으로 삼아 숙면의 필요성에 대해, 그리고 시몬스만의 ‘흔들리지 않음’을 각인시킵니다. 단, 첫 번째와 두 번째 에피소드는 쾌락과 소유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바탕으로 로맨티시즘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반면, 세 번째 에피소드는 화면 중앙 벽면의 벽시계가 말해주듯 인물의 육체적, 정신적 피로도와 그에 따른 휴식에 대한 욕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Benjamin Eidem) https://www.youtube.com/watch?v=2SQv10SBYIY


(Aneta Pajak) https://www.youtube.com/watch?v=n3yWpuFSji8


(Simmons Design Studio X Sean O’pry) https://www.youtube.com/watch?v=CcFfTi1bXqo


다른 듯 같은 이 광고는 궁극적으로 반복되는 욕구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무의식을 다루면서 시몬스는 죽음충동 대신 ‘숙면’으로 대체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광고에서 여성과 남성 그리고 유색인종의 성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방식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잠깐 정신분석학의 아버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설명한 죽음충동과 쾌락원리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프로이트는 몇가지의 기본 원리가 인간의 심리를 규정하고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쾌와 불쾌에 관한 것 입니다. 불쾌를 피하고 즉각적인 쾌의 만족을 추구하는 이 과정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그것을 넘어선 상태에 이르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즉, 손가락을 처음 빨아먹는 아기의 만족과 이후 그 만족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모든 것을 입에 넣고 빨아먹어도 성에 차지 않는 아기가 바로 이 같은 사례가 되겠지요. 매우 비약한 감이 있으나 쾌와 불쾌의 이 원리가 바로 쾌락원리이며 지속적인 반복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충동이 바로 죽음충동입니다. 시몬스 광고는 매우 복합적이나 그 핵심은 현대인의 루틴한 반복과 주이상스를 향한 해결책으로 ‘숙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광고를 보고 순간 제 시야에 겹쳐진 작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The Death of Sardanapalus>입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 둘은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앗시리아의 마지막 황제인 사르다나팔루스는 메디아와 바빌로니아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 니니베를 함락시키기 위해 쳐들어오는 순간에도 향락과 강렬한 쾌락을 추구했던 인물입니다. 반란군이 자신을 살해하고자 궁궐로 몰려오자 사르다나팔루스는 자신에게 쾌락을 주었던 모든 것들과 함께 죽기로 결심합니다.


maxresdefault.jpg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Oil on canvas, 392 cm × 496 cm, 1827.


1821년 영국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희곡을 재해석한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는 사르다나팔루스를 엄청난 소유욕을 지닌 탐욕스러운 인물로 묘사합니다. 캔버스 전체를 빼곡하게 매운 이 그림은 숨가쁘게 우리의 시선을 유도합니다. 작품 내에서 우측 상단의 불타는 도심만이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낼 뿐 황제의 애마를 죽이는 검은 피부의 하인, 침대에 두 팔을 벌리고 죽어 있는 진주처럼 하얀 피부의 여인 등은 황제를 중심으로 펼쳐진 살육의 현장 등을 상당히 관능적입니다. 붉은 색과 검은 피부와 하얀 살결의 강한 색채 대비로 인해 이 같은 느낌은 더욱 강하게 주어집니다. 터번을 두른 남성과 검은 피부의 하인들의 이미지는 매우 이국적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을 자극했을 것으로 판단되네요.


들라크루아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화가 입니다. 낭만주의는 서구의 철학의 기본 뿌리인 ‘이성’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회의는 인간의 감각과 가시적 세계 너머의 상상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는데요, 물론 시대적인 배경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당시에는 산업혁명 이후 개인의 감정이나 개성을 중요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미를 모범으로 삼았던 신고전주의 예술 이후 일어난 프랑스혁명이 계기가 되어 이성이 아닌 감성과 인간의 욕망을 담아내는 낭만주의는 더욱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감각과 욕망에 대한 상상력은 인간의 시각이 닿지 않는 곳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서양 남성들이 볼 수 없었던 동양의 하렘에 대한 상상력은 난교와 같은 비이성적인 차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르다나팔루스 역시 역사적 기록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앗시리아의 역사, 페르시아의 역사서를 쓴 크테시아(Ctesias)는 확실한 문헌을 따르지 않아 그의 역사서는 신빙성이 문제시된다고 하니 바이런의 희극과 들라크루아의 회화에 묘사된 사르다나팔루스의 엽기적 행각은 사실과 달랐을 것이며,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었을 것입니다.


객관적 사실에 충실하여 고대인들의 참된 진리를 추구하려는 신고전주의 이후 감각적인 욕망과 쾌를 추구하는 인간을 다룬 낭만주의 작가인 들라크루아는 인간의 탐욕과 쾌락 그리고 죽음을 사르다나팔루스라는 인물을 통해 재현했습니다. 동시에 서구 남성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시선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약 200년이 지난 2017년 3차원의 이미지를 다루는 미디어, 나아가 대기업 상품 광고인 시몬스 침대의 새로운 캠페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인간의 소유욕, 육체와 시간의 한계를 지닌 인간을 매우 자극적으로 낭만주의적인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더욱이 침대를 중심으로 빼곡하게 현대인의 스트레스(일종의 개인 학살) 를 감각적으로 보여주면서 숙면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점과 보는 이의 욕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200년 전 그림과 일맥상통합니다. 꼭 하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지금은 움직이는 이미지라는 차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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