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림〈태양의 죽음> 연작
‘달’을 대하는 태도가 동·서양이 각각 다르듯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 또한 문화에 따라 다양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달은 풍요의 상징이면서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는 신적인 대상이었으며, 그저 바라보고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라는 대상으로 존재했습니다. 이와 달리 ‘달(luna)과 ‘~스러운(~tic)’이 결합되어 제정신이 아닌 사람(lunatic)을 말하는 단어가 된 것처럼 서양의 달은 공포와 불안, 광기 등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서구에서의 달은 정복의 욕망이 확장된 물리적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은 냉전의 분위기가 연장된 공간으로써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달은 정복의 대상이었습니다. 1971년 한 해에만 두 나라의 탐사선이 10차례나 달에 닿았을 정도였으니 달의 정복은 곧 냉전의 패권을 거머쥐게 되는 것이나 다름 아니었습니다. 이는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 개발 경쟁을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달’의 이미지는 다양한 영상매체에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최근 저의 눈에 가장 들어왔던 이미지는 팬텀싱어 시즌 3에서와 토스 광고에서의 둥근 달이었습니다. 팬텀싱어3에서 테너 박기훈과 베이스 구본수가 부른 ‘리베라(Libera)’의 무대 배경으로 비추어진 달은 마치 피터팬이 되어 밤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것 같은 동화적 상상을 안겨주었습니다. 모바일 금융 플랫폼 토스(TOSS)는 인류의 위대한 도약을 안겨준 암스트롱(Neil Armstrong)의 첫 걸음을 통해 정복과 동시에 기존 금융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달과 우주인의 첫 걸음을 광고에 반영했습니다.
토스는 모두가 달을 좀 더 자세히 보려 노력하는 동안, 망원경과 사진 따위엔 관심도 없이 직접 가서 보고 만져야 성에 차는 인간의 야심을 자극하는 광고 카피라이트를 내세우며 그야말로 기존 금융계의 판을 전복시키고 있지요. 광고 선전비용에만 801억을 투자한 이 플랫폼의 광고에 활용된 달의 이미지는 기존 체계에 저항하며 남다른 생각과 실천을 향한 의지 등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성격 때문일까요? 아니면 광고 속 확장되는 달의 표면이 주는 느낌 때문일까요? 저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작품을 떠오르게 합니다. 바로 김구림의 작품 <태양의죽음>(1964) 연작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작품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김구림은 한국현대미술 1세대 작가이면서 한국 아방가르드미술의 선구자였다는 평을 받습니다. 존재와 소멸, 시작 등의 화두를 1970년 서울 뚝섬 살곶이 다리 근처 둑에 불을 지르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 대지미술의 시작을 알린 작가도 바로 김구림이었습니다.
그는 삶, 죽음, 존재, 소멸과 새로운 생성 등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는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의 과거 일화와도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과 소련이 달을 두고 한참 신경전을 벌이던 당시 김구림은 군 생활 중이었습니다. 힘겨운 군 생활 중 그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어느 날 가깝게 지내던 옆 침대의 동료를 갑자기 떠나보내게 되었다고 하네요. 당시 그에게 동료의 덧없는 죽음 보다 비통하게 다가온 사실은 사망한 동료의 노모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고 합니다. 사망 후 아무것도 모르는 노모가 멀리서 아들의 면회를 위해 병원으로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차마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할 수 없어 김구림은 아들이 휴가를 나갔으니 아마도 지금 집에 있을 것이라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힘겨운 군 생활 중 몸에 병을 얻고 죽음의 고비를 넘긴 작가와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떠난 동료, 그리고 그의 죽음을 모른 체 집에 있을 아들 생각에 들뜬 노모의 뒷모습, 이 모든 것은 작가에게 삶과 죽음, 참담한 당시의 현실과 인간에게 허용된 시간 등을 고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가 ‘삶’에 대한 내재적 감정을 표현한 것이 바로 <태양의 죽음>입니다.
늘 시대를 앞섰던 작가 김구림은 미술 장르의 구분과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실험정신을 잃지 않고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합니다. 김구림이 <태양의 죽음>을 제작하던 1960년대는 세계적으로 추상회화가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술은 대상의 재현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구상회화를 전복시키고, 평면 위의 표면적 질감이 감상하는 이에게 전달하는 감각이나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 자체 에 집중하면서 ‘회화’의 본질을 강조하는 데 보다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한국 미술계 역시 한국전쟁 휴전 이후 점차 안정을 찾아가면서 국제적인 흐름에 편승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다양한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는 세계 속의 한국을 지향하면서 서양의 현대적 감각을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내면적으로는 2차 대전을 겪은 유럽과 미국에서 성행했던 앵포르멜이(L’Art Informel)나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가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의 정서와도 통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집권하던 권력의 권위주의와 부패가 심해지면서 학생운동 등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 같은 전위적인 미술을 지향하는 성향은 기존 한국 화단의 등용문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투쟁하는 움직임과도 연결되어 다양한 실험미술의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기존 체제를 뒤집고 기득권에 저항하거나 전쟁의 상흔을 애도하려는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려는 미술경향은 이성이나 논리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감정과 감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김구림의 <태양의 죽음> 연작 역시 당대 미술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캔버스 위에 미술적 재료만 고집하고 미술의 자율성에 따라 미술이 미술 그 자체로만 여겨지는 것에 반대한 김구림은 추상회화가 삶과 동떨어져 있음을 인지했습니다. 역시 선구자답습니다. 때문에 그는 주변의 생활 오브제들을 작품에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미술을 생활 속으로 끌어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는 1962년 <핵1-62> 제작에 처음으로 비닐을 사용하고 이후 실, 비닐, 바늘, 플라스틱 등의 부속품을 접하고 이를 예술 재료로 접목시켰습니다.
<태양의 죽음>은 쉽게 불에 타버리는 캔버스 대신 나무 합판에 제작되었어요. 합판 위에 비닐을 오려 붙이고, 그 위에 석유를 뿌려 태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비닐이 불에 녹으면서 어느정도타면 담요로 불을 끄면서 약 70건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들은 그의 무명시절에 작품을 보관할 곳이 없어 50~60점은 불살랐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제작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가 됩니다. 주변의 사물들은 작가의 선택에 의해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됩니다. 또 그 새 생명은 불타면서 성질 자체가 변화되고, 그 불이 죽은 후 남은 것들은 태초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작가의 제작 과정은 인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남겨진 흔적을 대리합니다. <태양의 죽음>은 마치 인간의 삶과 죽음, 태양의 이글거림과 소멸 그 태양의 죽음 뒤 인간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달 등 모든 생성과 소멸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또한 미술이 우리의 삶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김구림은 깊은 사유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예술이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인간의 삶과도 연동되어 있다는 것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그는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인간과 사물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인지할 것인지, 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감각하는지? 나아가 작가로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대한 지적 사유 속에서 작품활동을 했으며 그의 실험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늘 깨어 있는 정신으로 하루하루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또 우리 삶의 흔적이 타버린 재가 아닌 새로운 탄생의 거름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그의 작품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