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상석에 앉으셔야죠”
퇴사 결심 전/ 첫 경험
처음 경험한 갑을관계는 불편하면서도 달콤했다. 반복됐던 갑을관계에 의심을 품지 못한 채 당연시했다. 이성복 시인이 <무한화서>에 썼던 "신기한 것들에 한눈팔지 말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세요"라는 문장을 처음 접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요즘 들어 선명해진다.
각 부서를 돌면서 수습 교육을 받고 있던 어느 날이다. 과천 정부 청사에 출입하는 선배에게 교육을 받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기가 한창 들어있을 때다.
"오늘 잘 놀았지?"
"아닙니다. 선배.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배우긴. 오늘 저녁에 뭐 하냐?"
"딱히 할 거 없습니다."
"술 한잔 할까?"
"네. 좋습니다."
강남으로 향하는 버스에 탔다. 청사 근처에서 둘이 한 잔 할 줄 알았는데 오판이었다. 집에서 더 멀어졌다. 선배가 살고 있는 동네도 아닌데 강남으로 가고 있다. 아는 술집이 있나,라고 생각만 하며 군말 없이 따라갔다.
강남역 근처에서 내린 선배는 술집들로 시끌벅적한 번화가에서 벗어나 한적한 빌딩들 사이로 길을 잡았다. 음식점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 빌딩으로 들어간 선배는 익숙한 듯 비상구 쪽으로 발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 2층 복도로 나오니 일식집이 보였다. 현관부터 고급스러웠다. 직원이 예약자명을 묻자 선배는 회사 이름을 줄임말로 댔다.
에스코트를 받듯 방으로 안내 됐다. 다다미방처럼 꾸며진 룸은 적어도 7~8명이 여유 있게 앉을 정도로 넓었다. 신발을 벗고 어디 앉을지 눈치를 보는데 선배가 팔을 뻗었다.
"저기 벽 쪽. 저기가 상석이야. 저기 앉자."
긴 상 가운데에 네 명 분의 식기가 세팅돼 있었다. 선배와 간격을 충분히 두고 나란히 앉았다. 선배 컵에 물을 따른 후 미뤘던 질문을 했다.
"선배, 오늘 같이 마시는 사람들이 있나 보네요?"
"아, 말 안 했지. 오늘 00에서 두 분 오실 거야."
"그렇군요. 전 선배랑 둘이 마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먹자. 너 술 잘 마시지?"
"술 좋아합니다."
"그래. 맘껏 먹어. 근데 이 아저씨들 왜 안 와."
'다다닥.' 상석에 앉은 지 5분 정도 지났을까, 급한 구두굽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문이 열리자 얼핏 봐도 우리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아저씨 둘이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들어왔다.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아저씨들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손이 잡힌 아저씨들은 선배 손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나는 처음 보는 아저씨들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취재원과의 첫 술자리를 하게 된 순간이었다. 취재원이라기보다 출입처 홍보실이 정확하지만.
"기자님 죄송합니다. 오늘 빨리 도착하려고 택시를 탔는데 그게 더 오래 걸린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형님들이랑 오랜만에 한 잔 하려니 시간이 빨리 가던데요."
"아이고, 더 자주 모셔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저희가 먼저 와서 안 쪽에 앉았습니다."
"그럼요. 당연히 상석에 앉으셔야죠."
곧 음식이 들어왔다. 메뉴는 고를 필요가 없었다. 이미 코스로 예약돼 있었다. 술도 따로 시키지 않았는데 한가득 들어왔다. 소맥을 마시고 위스키를 곁들였다. 음식은 계속 조금씩 들어왔다. 선배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아저씨들의 추임새는 격해졌다. 간간히 건배사를 했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둥켜 안았다. 오랜만에 술을 원 없이 마셨다. 그것도 내 돈 주고는 먹기 힘든 비싼 안주들을 아낌없이 남기면서.
4시간 정도를 한 식당에서 먹고, 마셨다. 아저씨들은 2차로 간단히 맥주라도 한잔 하겠냐고 물었지만 선배는 더 마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선배의 손사래에 아저씨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거 같다. 일식집을 나오자 아저씨들은 바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지하철 탈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아저씨들에게 붙들렸고, 선배는 여유롭게 담배를 물었다. 곧이어 검은색 세단의 모범택시 두 대가 우리 앞에 섰다. 앞에 선 차에 선배가 탔고, 뒷 차에 내가 탔다. 택시 문을 닫아 주던 아저씨는 기사님을 향해 "편히 모셔주십시오"라고 말하며 내게 어설픈 경례를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자님 또 뵙겠습니다. 오늘 영광이었습니다."
"오늘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또 인사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꼭 저희 출입이 돼주세요. 충성."
머리가 술기운으로 띵했다. 집 근처에 다다를 때야 비로소 택시비 생각이 났다. 처음 타보는 모범택시였다. 잡아준다고 그냥 탔다, 고 후회하는 순간 집에 도착했다. 카드를 꺼내려고 가방을 뒤지는데 기사님이 고개를 돌렸다.
"손님 집 앞까지 더 들어갈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얼마죠?"
"네? 계산 다 됐습니다."
"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