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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고양이상점 Feb 11. 2024

격정적 명상일지

11월 8일 명상에 이어 11월 9일 명상


 어제 명상을 하면서 버린 기억들의 잔상이 남아서 감정도 남아있었나 보다. 오늘도 어제 마음에 걸리던 기억들을 되짚어나갔다. 오늘 되짚은 기억은 할머니의 허형에 찬 요구와 엄마의 허영심이다. 아빠의 공부폭행도 있다. 아빠의 성격을 할아버지, 할머니 가치관을 내면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허영에 찬 여자였고, 아빠는 할머니와 비슷한 여자를 만났다. 어제의 기억을 되짚으면서, 엄마의 허영에 희생된 어린 나를 보았다. 표면상 멋있어 보이는, 있어 보이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마는 '나의 있는 그대로'를 희생시켰다. 명상을 하면서 생각된 기억을 버리는 내내 엄마의 허영에 희생당해 공허함을 느끼던 마음이 또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컸고 20세가 되던 해부터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정동진으로 새벽기차를 타고 가거나, 서울숲 다리에 홀로 앉아서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견디다 못해 엄마에게 인생이 이유 없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했을 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힘들다고 얘기하던 그 순간의 기억을 버릴 때 눈물이 흘렀다. '엄마, 나 힘들어'라고 하면서 울던 20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30이 넘은 나의 귓전을 때렸다. 이 순간에 나는 지금껏 엄마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지 못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엄마의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어린 '나'는 나의 본 모습음 숨기는 데 도가 텄고, 아빠의 결과만능주의 때문에 어린 '나'는 하염없이 목표를 향해 뛰면서도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성격이 되었고,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부정적인 결과를 걱정하는 성격이 되었다.


 부모는 나를 민주적으로 키웠다고 자부하지만, 나는 부모의 양육관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쉬는 법을 모르고 몰아붙였을 뿐이다. 대학교에 입학하던 때부터 나는 계속 부서졌다. 도서관에 처박혀서 강인한 주체를 발산하는 니체나 사르트르를 읽으며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면서 그들의 마음에 공명하며 울었고, 나름의 구원을 받았다. 그렇게 부모의 어떤 모습들은 내게서 완전히 박살 났고, 내 모습에 균열이 생겼다. 균열의 틈으로 소설과 시와 바람이 들어왔다.


돌아보며


작년 11월 8일과 9일의 통렬한 명상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30세가 지나서 홀로 앉아 그렇게 꺼이꺼이 울었던 적이 없었다. 인생을 통틀어서 그렇게 슬프게 울었던 적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부모와 나의 정서적 관계도가 이전보다는 선명하다. 나는 부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잘 몰랐다. 어렴풋이 불편한 느낌만이 있었다. 부모자식 간 감정적 지형을 잘 밝혀서 들여다보는 일은 혹독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도 가끔 부모를 원망하지만, 정서적으로 많이 독립이 된 것 같다. 마음은 조금씩 나아지지만 계속해서 원점으로 처박힌다.


 

  누군가 내게 '부모님을 사랑하니?'라고 묻거든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별로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가끔 연민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게 마음의 현주소인 듯하다. 마음이 튼튼한 사람들은 알 것 같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별로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가끔 연민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닦아서 들여다 보아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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