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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고양이상점 Apr 11. 2024

선악의 저편

니체제목을 훔침, 사실은 명상.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말은 참말인가


 명상을 하다 보면 느끼는 게 하나 있다. 나는 나를 정말 모른다. 나라는 것을 부수고 또 부숴도 내가 얼마나

나를 몰랐는지만 알아갈 뿐이지 정말 스스로를 모른다. 문득, 무서운 마음이 든다. 내가 그동안 쏟아낸 말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옳고 그름


 내가 나를 모른다는 무서운 자각에 이른 후 나는 비판과 평가를 거의 하지 못한다. '내가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옳고 그름을 말할 자격이나 있나'하는 생각 때문에. 내 기질과 성장배경에서 어떤 사태를 보고 옳다고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럴 것인데 시시비비를 가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나는 내 경계 내에서만 옳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 경계 내에서 옳다. 옳고, 그름 따위 가려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마음에 이르렀다.


모래 위의 성


 내가 나를 모르는데 무슨 말을 하겠나.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내가 모르는 새로운 내가 출현하면 말은 힘없이 바뀔 텐데. 차라리 모래 위에 성을 쌓고 말지.  


세상엔 진실도 거짓도 없어

 

 세상엔 진실도 거짓도 없다. 인간은 노력하지 않는 한 자신의 경계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게 현재 생각이다. 자신의 경계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많은 말들이 날아다닌다. 그런 말들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어떻게 알아?


 현재 내가 어떤 놈인지 알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인간인지 알려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면 되지 않나 싶다. 행동은 나를 대변한다. 신호등 예를 들어보자. 신호등이 빨간불이면, 사람들은 멈추고, 초록불이면 지나간다. 출근시간이 9시면 9시까지 가고, 장례식장에는 검은 양복을 입고 가고. 이런 건 신호등이 빨간불이거나 초록불일 때처럼 사람들의 행동근거가 명확하다. 그럼 노란불일 때는?


 노란불일 때는 느낌 보고 가거나 멈춘다. 경찰이 노란불에 튀어나와서 '님 신호위반 했습니다'.라고 하면, 우리는 둘 중 하나다. '그런 게 아니라~, 아니 내가~' 요렇게 변명을 하거나, 수긍하는 경우다. 우리가 노란불에 갈 때는 '딱지 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가본다'라는 마음이 있다고 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방어기제라는 게 있기 때문에 자기를 잘 알기가 어렵다. 방어기제라는 필터를 통하면 우리는 늘 노란불인 상태에서 어떨 때는 지나가고 어떨 때는 멈추고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스스로에게 불리한 상태가 되면,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스스로를 옹호한다. 또 스스로에게 유리한 상태가 되면 으스대면서 자아를 강화한다. 그러니까, 노란불인 상태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노란불인 상태에서 행동을 해놓고 변명을 하거나, 자기를 방어하려고 든다면, 자기를 모른다고 봐야겠다. 우연이 이득을 봐서 으스댄다고 해도 똑같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게 제 모습이니 변명의 여지는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바닥을 보고 그렇게 살기로 한 게 아닐까.


 명상은 노란불 구간을 최대한 제거하면서 스스로에게 초록불이나 빨간불로 세상을 구분하는 혹독한 과정인 듯하다. 이전에는 노란불 구간이었던 것을 직면하고 나면, 남들은 다 가는 느낌 좋은 노란불일 때 나 혼자 빨간불이어서 멈출 수도 있다. 이 말은 무서운 말이다. 자기의 바닥을 직면하면, 내게 옳은 것은 세상이 손가락질할 때도 옳은 것이기 때문에 타협이 힘들어지고, 내게 그른 것은 세상이 좋은 것이라 할 때도 그른 것이기 때문에 또 타협하기 힘들다. 사랑이 개입한다면, 말이 또 달라지는 것 같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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