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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엘 Feb 16. 2016

14_사랑을 시험하는 3300 계단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ABC) 3일 차

우리는 5년의 열애 끝에  결혼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 3일 차와 연애, 그리고 결혼이 무슨 상관이 있겠나 싶겠지만 이 날 오후 안나푸르나는 사랑의 시험장으로 변한다.




어젯밤, 어둠 속에서 찾아들었던 숙소는 이 동네에서 가장 인기 없는 숙소였던 것 같다. 짐을 싸들고 숙소를 나와서야 훨씬 멋지고 깨끗한 숙소들이 주변에 보인다. 아쉽지만  조난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오늘은 힐레 - 티케둥가 - 울레리를 거쳐 반단티까지 가야 한다(아래의 그림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어제는 계획보다 많이 오르지 못 했기에 오늘 조금 무리가 될 수도 있지만 도전해 보기로 한다.


오늘의 여정
힐레 - 티케둥가 - 울레리 - 반단티까지



오전 일찍 출발하니 기온이 시원해 걷기 나쁘지 않다. 걸음을 시작하고 한 동안은 숨도 차고 힘들지만 땀이 나고 몸이 풀리기 시작하면 페이스가 찾아지고 그리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다. 1시간 좀 넘게 걷자 힐레에 닿는다.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인상적인 산 중턱의 마을이다. 마을 위아래로 산비탈에 만들어 둔 다랭이 논과 밭들을이 많다. 이렇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늘 웃으며 살아가는 네팔 사람들이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생수 두 병을 사서 아내와 한 병씩 나눠 배낭 옆 주머니에 꽂고 다시  출발한다(네팔에서는 가능한 생수 =  미네랄워터를 사 마셔야 한다. 아무 물이나 먹다가는 설사병에 걸리기 쉽다.  미네랄워터가 없다면 끓인 물을 이용하면 된다). 있는 힘을 다해 올라왔으나 티케둥가까지는 완만한 내리막을 그리며 다시 내려간다. 이 내리막이 원망스러울 즈음 눈 앞에 펼쳐진 울레리의 오르막을 보며 기겁한다. 힐레 - 티케둥가 - 울레리는 완전히 브이자(v)를 그리는 지형이다. 실컷 올라왔더니 바닥까지 다시 내려갔다가 다시  끝없는 오르막을 올라야 하는 난코스다.


울레리 계단을 오르다 내려다 본 티케둥가와 힐레
울레리의 끝 없는 돌 계단 / 출처: https://ilmiosognonelcassettoblog.files.wordpress.com


티케둥가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 울레리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자 가파른 돌계단 길이 나타난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라 햇살은 피할 곳 없이 내리쬐고 아래에서  돌계단은 삼겹살 불판처럼 뜨거워진다. 경사는 점점 가팔라지고 계단은 끝이 없다. 땀이 줄줄 흐른다. 고개를 들어 뒤를 보니 오전에 지나온 힐레와 티케둥가가  발아래 보인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나도 모르게 이 문구가  마음속에 던져졌고 마치 주문인 것 마냥 계속 중얼거리며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고 또 오르면.... 오르고 또 오르면'


한 계단 한 계단 지루하지만 어쨌든 하나씩 오르니 끝이 나겠지. 지나쳐온 입간판엔 울레리의 계단이 3300개라는데... 3300원을 빌려서 1원씩 갚는 꼴이구나. 등에진 배낭은 착실하게 중력을 받아 나를 짓누르고 종아리와 허벅지는 벌써 뻣뻣해져 온다. 극기 훈련이 따로 없다.


이쯤 되니, 저 아래서 따라오는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이 걱정된다. 잠깐 서서 가까이 오기를 기다린다. 가까이 오면  '오를만하냐? 힘들진 않냐?'라고 자상하게 물어볼 참인데, 30여 미터 앞으로 다가오자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고 있는 게 보인다. '나랑 같이 사는 사람' 걱정이 아니라 '내' 걱정을 해야 될 것 같다. 아내는 얼굴이 벌겋게 되어 숨을 헐떡거리며 다가온다. 원망과 분노의 눈 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우리 계속 가야 돼?"


이 한 문장에 우주만큼 깊고 넓은 의미가 느껴진다. '괜히 왔다. 돌아가자. 너무 힘들다. 너만 먼저 가냐?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못 가겠다.' 등등. 5년의 연애는 아내의 마음의 소리를 알아듣는 어학연수 기간이었고 아직 네이티브 수준은 아니지만 저 정도 해석은 가능하다. 순간 직감적으로 '아, 지금 이 순간이 아직 반 년 밖에 안 된 지금까지의 결혼 생활과 앞으로 남은 결혼생활까지 포함해 세 손가락에 꼽힐만한 위기의 순간이구나'란 판단이 선다.


지금 내려갈 순 없다. 지금 내려간다면 평생 후회할 뿐 아니라 서로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살 것 같다.  마음속에서 복잡한 흙탕물이 인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가봐야지'


생각을 정리하고 아내가 짊어진 배낭을 달라고 한다. 배낭을 어떻게 2개나 지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삼세번만에 아내는 배낭을 넘겨준다. 꽤나 깡다구(?) 있는 아내가 세 번 만에 배낭을 주는 걸 보니 정말  힘들긴 한가 보다. 등에는 내 배낭을, 앞에는 아내의 배낭을 짊어진다. 도합 25Kg는 넘을 텐데. 날은 점점 더워지고 핑 돌 것만 같다.


'에라 모르겠다. 죽기밖에 더하겠어?'


다시 계단 오르기 시작. 무게가 불어났지만 생각은  그만큼 더 비워졌다. 지금 이 상황에선 생각도 사치다. 텅 빈 머리 속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오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본다. 그렇다. 히말라야에서도 배낭을 앞뒤로 메고 오르는 사람은 흔치 않다. 보아하니 포터는 아닌 것 같은데 뭐 하는 사람인가 싶은 가 보다. 서양에서 온 한 할아버지 트래커가 지나가며 말을 건다. 뭐하는 사람이냐고. 나는 뒤따라 오는 아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 Her husband(저 사람 남편이요)"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오! 하며  엄지를 척 들어 올리고는 좋은 남편이 되려면 슈퍼맨이 돼야 된다며 껄껄 웃고는 지나간다.


좋은 남편이 되려면 슈퍼맨이 돼야 해


명언이다. 몸소 느끼고 있다. 두 개의 배낭을 메고 걸은지 2시간이 넘으니 드디어 끝이 보인다. 울레리다. 울레리에서 오늘의 목적지인 반단티는 그리 멀지 않다.


지금 보아도 정말 힘들어 보인다


떨어진 당을 '이스프라이트'(왜 이스프라이트인지는 이전 글을 참고하시길)로 충전한 뒤 다시 걷는다. 울레리까지의 3300계단에 비하면 반단티까지 이어지는 길은 천국이다.


반단티가 보인다. 오늘은 여기서 머문다. 지나가다 마당 넓고 깨끗해 보이는 롯지가 있다. 헤븐 뷰 게스트 하우스 Heaven View Guest House. 멋진 이름이다. 오늘 힘든 여정의 끝에서 만난 이 곳이 우리에겐 천국과  다름없다.


짐을 풀고 밥을 먹는다. 주인 할머니 음식 솜씨가 예술이다. 기분이 좋다. 오후 내내 눈에서 레이저를 쏘던 아내도 한결 온순(?) 해졌다. 다행이다.



밥을 먹고 게스트 하우스  뒷마당으로 마실 간다.


이틀째 저녁이 되어서야 만난 눈 덮인 안나푸르나 남봉. 그 황금 노을을 길게 바라본다.


삶이 감사하다.



훗날 트래킹이 끝나고 카트만두로 돌아간 뒤 아내는 제게 말 했습니다. 울레리 3300계단에서 배낭 두개를 지고 올라갈 그 때서야 제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확신했다고... 프로포즈나 결혼식장이 아닌 안나푸르나 울레리 고개길에서 말입니다. '사랑에 대한 확신도 없이 나랑 결혼해서 네팔까지 왔단 말인가?' 뭐 다 이해되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확신을 주었다니 기뻤습니다. 사랑에 확신이 필요한 분들 한번 떠나 보시는 건 어떨까요?


네팔맛집 헤븐뷰 게스트 하우스


게스트 하우스 식당에서
저녁 노을에 황금빛이 된 안나푸르나 남봉
이제 입 다물면 네팔사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래킹 처음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sme007/12

*네팔이야기 처음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sme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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