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ade in Nepal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삶엘 Mar 18. 2016

15_세상 가장 묘한 숙소, 고레빠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래킹 4일 차

오늘은 푼힐 전망대가 있는 고레빠니까지 간다. 네팔에 온 뒤로 걷는 것 외엔 운동을 특별히 하지 않아 이틀간의 산행에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앞으로 만나게 될 멋진 풍광에 대한 기대감에 마음만은 가볍고 즐겁다.

화창한 아침



어제와 다르게 길은 울창한 숲으로 이어진다. 햇볕을 가릴 만큼 숲이 깊다. 짐을 가득 실은 조랑말 무리와 만나기도 하고, 시원한 계곡 곁을 걷기도 한다. 한참을 걷다가 만난 간이매점의 한글 메뉴판은 명절에 만난 어머니 얼굴처럼 반갑고 정겹다.

호랑이도 살 것 같은 깊은 숲
저리 비껴라. 조랑말 나가신다.
계곡 물소리에 속이 뻥 뚫린다.
한국 사람들 정말 많이 오나 보다


오후 3시, 오늘의 목적지인 고레빠니가 저 위로 보인다. 높은 곳에서부터 먹구름이 내려오고 있다. 비가 올 수도 있겠다 싶다. 비가 오기 전에 얼른 도착하고 싶다. 비는 낭만적이지만 산 속에서 비 때문에 젖게 된다면 그만큼 피로와 저체온증 같은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다.



다행히 비가 오기 전에 고레빠니에 도착했다. 어디에 짐을 풀지 고민이 된다. 기왕 높이 있는 곳이 경치가 좋지 않을까 싶어 마을 뒤쪽 언덕을 따라 올라가 본다. 어둑해져 가는 마을. 여기저기 하나둘씩 굴뚝 위로 연기가 솟아오르는 모습이 한없이 평화롭다.


먹구름이 더 이상 못 참겠다며 한껏 머금었던 비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바로 옆에 슈퍼 뷰 롯지란 숙소가 있다. 얼른 들어왔다. 이것저것 가리고 따질 것이 없다. 비를 피하고 어둠을 피하고, 피곤한 몸을 누일 수 있다면 그만이다. 숙소의 1층에는 큰 난로 하나가 중앙에 위치해 있고 그 주변으로 식탁 4~5개가 자리 잡고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둡지만 난로에서 조용히 퍼져나가는 온기가 공간을 아늑하게 한다.


주인의 막내동생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과 인사를 나누고 체크인을 한다. 체크인이라고 해봐야 안내해준 방에 올라가 침대에 배낭을 던져두고 하루 종일 등산화에 옥죄인 발에 슬리퍼를 신겨 주는 것이 전부다. 다시 1층 식당으로 내려왔다. 조용한 공간 속에 우리만 있다. 꿀을 넣은 홍차를 주문했다. 피곤한 몸을 플라스틱 의자에 기대어 놓고 창 밖을 본다. 비구름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일 새벽 푼힐 전망대에서 일출을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걱정도 되지만 금세 잊는다. 


비는 오고 난로에서는 나무가 타고 있다. 타닥타닥.

막 끓여온 따뜻한 홍차 한 잔.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음악.


가만히 창 밖을 보고 있다.  비 구름은 고갯길 정상에 있는 마을을 쉽사리 넘지 못하고 골목을 따라 조용히 흘러간다. 머리 위가 아닌 바로 눈 앞에서 바람처럼 흐른다. 사방이 하얗다. 시간과 공간을 지우개로 지워낸다.  천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은 하나의 섬에 표류해온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그런 감정이 나로 하여금 방향을 잃게 만든다. 마침내,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과 가장 멀리 떨어져 온 이 순간. 여기에 오르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어 텅 비어버린 내 몸속으로  충만하게 차 오른다. 새벽녘 소리 없는 밀물처럼.


좋다. 전기도 없고 전화도 없다. 어둡고 따스하다. 창가를 맴돌면 내 걸음에 나무 바닥이 찌그덕 말을 건다. 


그토록 고대했던 히말라야의 아침 일출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아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내게는 지금도 충분히 좋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곳 만이 주는 이 느낌.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 가장 멋진 순간이란 생각이 든다. 묘하다.





트래킹 중 숙소는 예약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 시스템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착순이 원칙입니다. 따뜻한 샤워는 가능하지만 태양열을 이용해 물을 가열하기 때문에 늦게 가거나 비가 오면 찬물 샤워로 돌변합니다. 대부분의 숙소는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방에 침대만 있습니다. 화장실이나 샤워, 식사는 공용공간입니다. 각 침실은 난방이 별도로 되지 않기에 침낭을 챙겨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높이 올라갈수록 공포스러운 추위를 맛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같은 메뉴여도 높은 곳의 숙소들이 더 비쌉니다. 모든 물자는 사람이나 말이 짊어지고 올라가야 하기에 높이 있는 곳은 그만큼 운송비가 더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숙소의 메뉴 가격은 네팔 정부에서 매년 일괄적으로 정하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쓰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만 매년 가격 상승폭이 커서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점은 아쉽습니다. 


숙소 식당에는 여러 나라에서 오는 트래커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들 마음이 열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미소와 함께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하면 훨씬 더 즐거운 트래킹을 할 수 있습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래킹 처음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sme007/12


*네팔이야기 처음부터 읽기

https://brunch.co.kr/@lsme007/2


매거진의 이전글 14_사랑을 시험하는 3300 계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