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치기해변-온평포구
총 길이15.8Km소요시간4-5시간난이도★★☆: 쉽다고 하지만 몸이 성하지 않은 내겐 쉽지 않았다. 그나마 평소에 걷기 연습을 해왔기에 부대끼지 않았지만 길 하나하나에 스토리를 품고 있는 제주는 어느 둘레길보다 아름답다. 갔던 길을 걸어도 계절과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누구와 함께 걷는가에 따라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버스 번호: 201번 (동부관광도로 노선, 성산/표선 방면)
운행 간격: 약 20~25분
소요 시간: 약 1시간 40분
요금: 2,800원 (2025년 기준 일반요금 기준)
걸었던 길을 걷다 보면 그 길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오르막과 내리막 바다와 산을 반복하다 보면 그 길이 그 길이고 길들이 구분이 가지 않는 이유이다.
내수면 둑방길은 인공으로 조성한 담수나 기수의 물이다. 조선 말기에 보를 쌓아서 만든 논은 이미 늪지대로 변했고 새마을 사업으로 조성한 8만 평의 양어장 역시 거의 버려진 상태로 그 흔적만 부표와 설치물에 있다. 왼쪽에는 내수면이고 오른쪽에는 바다가 있어서 그 사이로 가로질러가는 느낌은 물이 빠지고 나면 걷기가 가능하다. 오전 이른 시간이나 오후 늦은 시간이 좋다.
올레 2코스의 백미는 내수면이었던 곳에 이제는 양식을 하지 않지만 밀물이 아니라 썰물 때 이 양식장들의 경계에 바다 돌담이 있다. 아쉽게도 물이 차 올라서 바다 돌담이 눈에 보일 듯 말 듯 해다. 다음에는 걸어보리라..
내수면 둑길은 바다와 물길 사이에 있다. 제주 속의 또 하나의 길이다. 수면 위로 걷는 듯한 둑길 위에서는 성산포는 그림자가 된다. 현무암 마당바위 위에 파도가 실렁실렁 부딪쳐 울릴 때는 제주도가 노래를 부른다. 잔잔한 물빛과 바람이 만나는 지점이다. 제주에 가족이 함께 온다면 반드시 이 길을 걸어야 한다. 다만 커피와 김밥을 가져와서 둑에 앉거나 현무암을 한 덩어리에 앉아서 멍을 때리며 먹고, 마셔도 좋다.
차를 타고 주차하고서 성산포 봉우리만 올라왔다 갔다가를 반복했지만 성산포 꼭대기에서 내다 보였던 그 바다와 호수, 내수면을 구석구석 돌아보리라 생각도 못했다. 제주는 그냥 차로 왔다 사진 한 장 찍고 돌아가면 아무것도 볼 것도 먹을 것도 없다. 싸갔던 김밥을 앉아서 먹는데 사진에 보이는 이쁜 막내 아가씨는 " 엄마 저 아저씨가 먹는 거 나도 먹고 싶어"라고 졸랐다. 이내 나의 가방에 있던 내가 먹을 김밥을 한 줄을 아가씨에게 드렸다. 손수 싼 김밥이었는데 맛있게 먹으면 나도 행복하겠다.
내수면 양식장 앞에서 보이는 성산포를 두고 뒤쪽 식산봉을 올라가기 전에 김밥을 한 줄 먹었다. 물론 나머지 한 줄은 조오기 예쁜 아가씨가 드셨다.
식산봉~전해지는 이야기
높이 40여 m의 오름으로 바다에 직접 잇대어 있는데, 고려조와 조선조 내내 소섬(우도)과 오조리 바다에 유독 왜구의 침입이 잦아 당시 오조리 해안 일대를 지키던 조방장(助防裝)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이 오름을 난 가리처럼 위장, 마치 군량미를 쌓아 놓은 것처럼 꾸며 이를 왜구들이 먼바다에서 보고는 저렇게 군량미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으니 병사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라고 짐작하고 함부로 넘보지 않았다는데서 연유한 이름이 식산봉(食山峰)이다. 제주 동쪽에 끄터머리에 있는 산봉우리인 만큼 왜적들에게 노출이 쉽게 되었으리라. 오름에는 맥문동, 청미래덩굴, 율초 등 많은 약초들이 분포하고 있다.
식산봉을 오르다 보면 내수면에 물이 차서 다리를 건널 수 없다. 특히 비 온 날 오전부터 걸었는데 점심이 다되어갈 때 물이 차서 서서히 빠지는 시간이었다. 옆길 산길을 걸어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돌아갈 수 있지만 이런 길을 걷다 보면 먼저 걸어가신 분이 돌아오시면서 길을 안내해 주신다. 길동무가 그래서 중요하다.
족 지 물
오지리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있다. 노천탕으로 위쪽은 여자탕, 아래쪽은 남자탕으로 구분 사용 하였으며 맨 위쪽은 채소를 씻기도 하고 음용수 로도 사용하였다. 빨래터의 흔적도 보인다.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주변에 조성된 동네이름도 족지동네이다. 예전과 같이 이용이 많진 않지만 여름철 피서지로 지역주민 및 관광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오조리(吾照里) 마을의 유래
고려조 말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조선조 성종 무렵에는 안 가름에 많은 주민이 거주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오조촌(吾照村)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왜구의 침입이 잦아 다시 새가름으로 옮겨 앉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병사와 관련된 지명들이 여러 군데가 있다. (주군디물, 장시머들, 병문기, 짐수막 등)
오조리는 오래전부터 조선술에 능한 목수들이 많았고 어로행위도 활발하여 온갖 선박들을 제조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오조(吾照)라는 말은 한자 그대로 해가 비추는 성산 앞바다 일출봉 건너 에서 떠오른 해가 햇살을 뜨면 가장 먼저 와닿는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것이라 한다.
성산포 성당은 본당 앞, 옆, 넓은 잔디밭과 정원공간이 있다.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있는 곳이다. 성당 뒤와 옆으로 성모동산,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어서 조용하게 묵상하면서 걷거나 사색하기에 좋은 곳이다. 차량을 끌고 온다면 여기에 주차를 하고 잠깐 생각에 잠겨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뒤쪽의 성산 일출봉을 배경으로 잔디 외 수로를 걷는 기분.
이쯤 오면 숨도 차고 지치고 그러하다. 성당 옆에 오일장도 있지만 편의점에 들여서 맥주를 한 캔 사서 마시면 꿀맛이다. 물은 그저 물맛이다.
대수산봉
고성리 일대 두 개의 오름 사이에는 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흐르는데, 물을 기점으로 큰 오름을 ’ 큰 물뫼’, 작은 오름을 ’ 작은 물뫼’라고 부른다. 대수산봉은 큰 오름인 ’ 큰 물뫼’의 한자 표기이다. 대수산봉 정상에 서면 제주올레 1코스 시점인 시흥리부터 종점인 광치기 해변까지 아름다운 제주 동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길은 돌담과 하우스 농가들이 길가가 나타난다. 제주의 평범한 농가들부터 일반 집들을 볼 수 있다. 언덕이 좀 가파르기는 하지만 짧아서 무난하면 분명 올라갈 가치가 있는 곳이다. 특히 동쪽 우도, 섭지코지, 성산포 이외에 오름들도 보인다. 360도의 파노라마를 구경하기에 이보다 더한 곳은 없다. 특히 제주 동부 동해안 쪽 조망이 베스트오프 베스트이다.
흐르는 물을 사이에 둔 고성리의 두 개의 오름 중 큰 오름인 '큰 물뫼'이다.
정상에 서면 1코스 시흥부터 광치기까지 아름다운 제주 동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섭지코지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다.
왼쪽이 성산포이고 오른쪽이 섭지코지해수욕장이다.
수산봉은 원래 봉수(봉화대)가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정의현의 수산진에 소속된 2중 원형으로써 외단 직경 45m, 내단 직경 29.6m 규모의 토축 봉수료 조선초기에 소수산봉에 있다가 조선 중 후기에 이르러 대수산봉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되며, 상응봉수로는 남서방향 독자 봉수(독자봉), 북동방향 성산봉수(성산 일출봉)와 교신을 하였고, 별정 6명, 작군
대수산봉이 한때는 성산일출봉과 해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적이 위치에 있었다. 바로 아래가 바다, 동쪽으로 광치기해변과 신양포구로 과거 군사적 감시, 통제 지점으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1970~80년대는 이 오름 정상부와 일부 경사면이 군 감시 초소 및 통신시설 지역으로 지정되었는데 오르다 보면 그 흔적이 철조망으로 보인다. 이 오름을 오르다가 내려오면서 인사를 하는 올레꾼에게 여쭤봤더니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자료를 더 찾아보았더니 2000대 초반에 국방부의 군사보호지역 조정 사업이 진행되고 오름 구역이 해제되었고 대수산봉도 민간에 개방되었다. 2007~2008년경 제주올레길 2코스 노선이 생기면서 이 오름이 공식 코스로 포함되어 산책로로 복원되었다.
대수산봉을 내려오면 끝없이 펼쳐지는 배추밭, 무밭, 귤밭이다. 시멘트 콘크리트 길이 밭길로 농기계나 트랙터들이 용이하게 드나들게 만들어져 있지만 등산화를 신고 걷기에는 투박한 길이다. 흙길이 지면의 밀착과 함께 땅과 교감하기에 좋다.
그렇게 내려가다 보면 혼인지가 나온다. 혼인행사가 일정 간격으로 있는지 축제 등이 매달려 있다. 혼인하는 장소로도 사용되는 공간이다.
혼인지
제주의 옛 신화 중 하나인 ’ 삼성신화’에 나오는 고, 양, 부 삼신인이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와 혼인한 이야기가 깃든 연못으로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삼신인이 세 공주와 결혼을 한 뒤 잠시 살았다는 바위동굴 집이 있다.
이 동굴은 혼인지에서 동쪽으로 약 30m 지점에 위치하며 용암 암반이 발달된 완만한 구릉지대에 형성된 탐라시대 유적이다.
고. 양화. 부 삼신인과 벽랑국 세 공주가 이곳에서 첫날밤을 보냈다고 하여 '신방굴'이라고도 불린다. 남쪽으로 트인 동굴 입구에 들어서면 세 방향으로 가지굴이 나뉘어 있는데, 이 3개의 굴에 삼신인이 각각 신혼방을 꾸몄다고 전해진다.
이 동굴에서 적갈색 경질토기 편 등의 유물이 소량 확인되는데, 이것이 만들어진 탐라시대 전기 AD 0~300는 대규모의 마을 유적이 형성되는 시점이다. 따라서 이 유적은 상시 주거용보다는 임시 거처 또는 제의 제사의식 공간 등의 특수한 공간으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혼인지는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의 시조인 삼신인이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 온 나무상자 속에서 나온 벽랑 국세 공주를 만나 혼인한 곳으로 알려진 연못이다.
삼신인은 그 나무상자 속에서 나온 망아지, 송아지를 기르고 오곡의 씨앗을 뿌려 태평한 생활을 누렸으며,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무상자가 발견된 해안을 '황루알'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황루알에는 세 공주가 나무상자에서 나와 처음디딘 디딘 자국이 암반 위에 남아 있다.
온평마을 (溫坪里): 이 마을 어귀를 들어서면 마을이 편안하다. 따뜻한 들판이라는 뜻처럼 바람이 적고, 햇살이 포근한 마을이다. 길을 잘 못 들어서 걸어오는 모퉁이에서 할머니가 길을 잘 못 들어섰구먼라고 해서 '할머니 몇 살이세요?', ' 94개'라고 하신다. 아이들은 3개(?), 서울 한 개 살고, 제주도에 2개 살고, 나는 여기 혼자 산다고 하신다. 특히 온평포구와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푸른 밭과 돌담길, 해녀들의 물질의 도구가 전시된 곳도 있다. 온평의 혼인지는 제주가 태어난 삼신인(고, 양, 부 삼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 명의 공주를 맞이하여 탐타국을 세웠다는 곳이다. 혼인지 입구에 돌하르방과 신화 조형물, 삼신인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제주의 신화가 시작된 곳이 온평마을이며 여기가 '탐라의 시원지'라 불린다. 그래서 이 마을을 " 하늘과 바다가 만난 자리"라고 불린다.
온평마을 역시 제주 4.3 사건의 파도를 뛰어넘지 못했다. 남동부 지역 중에서도 피해가 컸던 곳 중의 하나이다. 마을 일부가 소실되었고 주민들이 피신하면서 바닷가, 돌담길과 동굴(숨은 굴)등이 은신처로 사용되었고 마을 곳곳에 4.3 위령비와 추모 표식이 남아 있다. 해녀들의 숨비소리와 돌담길의 바람이 들려주는 제주의 노래가 있는 곳이 여기 온평마을이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소재지 :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66-2 외 6필지 선-온평리에도 어김없이 환해장성이 있다. 비교적 높고 온전하게 쌓여 있다. 제주도 해안길을 걷거나 자동차로 다니다 보면 돌담 같이 보이는 것들은 모두 환해장성의 흔적이다. 제주는 그렇게 생존에 필사적이었다. 어떻게 그들은 살아남았을까? 제주도가 힘을 내면 좋겠다.
환해장성은 제주도 해안선 300여 리 약 120km에 쌓은 석성을 말한다. 고려 원종 11년 1270 몽골의 굴욕적인 강화에 반대를 하는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가 용장성을 쌓아 항거하다 함락되자 들어가는 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영암부사 김수 고여림 장군을 보내어 쌓은 시초이다.
고려왕조 말까지 보수 정비를 하면서 왜구 침입을 방어하였으며, 현재 양호하게 남아 있는 개소은평, 신산, 곤홀, 별도, 삼양, 북촌, 동복, 행원, 한동, 애월을 제주도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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