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by 로망버드

항상 어떤 고백을 하는 기분이다. 아이의 사춘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내 첫째 아이는 사춘기, 정확히는 키가 훅 크는 시점부터 아주 조용히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어 유난히 외모에 신경을 쓰는 듯 하더니, 급기야 안경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나보다. 눈이 나빠 눈을 찡그리며 멍한 표정으로 다니는 것도 본인은 모르고, 증명사진을 찍을 때도, 학교에 갈 때도 안경을 쓰지 않고 가서 내 속을 태웠다. 필요한 책을 가져다주러 교문에서 기다릴 때 아이는 안경을 쓰지 않고 흐리멍텅한 눈으로 내려왔고, 나는 막 잔소리를 퍼부었다.

사춘기란, 이런 사건들의 연속이다. 나는 내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 대해 관용을, 이해를 베풀 수 없었다. 나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식은 듯한 연인 앞에서, 나는 화만 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냥 보고는 있을 수 없는 법. 테를 바꿔주겠다, 갑자기 쓰고 가면 어색할테니 개학하면 쓰고 가자, 내 딴에는 정말 연애할 때도 안 해 본 지능적인 밀당을 하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가족은, 육아는, 결국은 인간관계라, 아이의 몸이 크면 끝났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어려운 것이었다. 계속 감정을 기르고, 다듬고, 지키고, 내보내고 들여오고 하면서 빚어가는 것이었다.

누가 숨기려고 해서 숨긴 것도 아닌데 임신과 출산, 육아, 그 신생아기의 그 험난한 비밀을 알게 될 때 입이 쩍 벌어지는 배신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처럼, 사춘기 또한 공공연한 비밀로 전해져 내려왔다. 대나무숲의 '임금님귀는 당나귀귀!!' 같은 외침처럼, 제대로 들으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아 바로 옆에 있어도 보이지 않고, 아무리 얘기해줘도 들리지 않고, 그 비밀의 숲에 발을 들여서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에코처럼 숨어 있는 그런 것. 비밀의 진흙탕 같은 것.

아니나다를까, ‘당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 그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정말 어려운 시기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라고, ‘가족의 역사’에서 대니 샤피로라는 사람이 얘기했다고 ‘부모로 산다는 것’ 에 저자 제니퍼 시니어가 언급해두었다. 사춘기는 부모 입장에서 재미없기로 유명한 양육의 한 단계라는 말도.

그렇다, 나는 ‘부모로 산다는 것’ 에 갑자기 좀 많은 피로감을 느껴서, 바로 그런 제목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던 것이다. 거의 몇 년동안 육아서같은 것은 집으려고 하지조차 않았음에도.

한번 들어오면 나갈 수 없고, 숱한 소문만이 무성한 그 대나무숲 막 초입에서, 나는 아이를 성인으로 키워낸 모든 부모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 시절 진흙탕속에서 뒹굴며 마디가 굵어지다가 마침내 어떤 항복의 백기처럼 하얀 연꽃으로 고개를 든 그 백의종군들에게. 무조건적인 경의를 표한다.


변해버리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살면서 그리 이별이 많지는 않았고, 굳이 말하자면 헤어질 것 같을 때 먼저 헤어져버리는 방법을 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이의 사춘기는 그럴 수가 없다. 아름다운 이별이 있다는 것을 겪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공지영의 책에서던가, 누군가 그랬다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삶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이런 맥락에서,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사랑을 받아들이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중학생이 되는 아들과 유년에 대한 '이별의식'을 하겠다며 둘만의 캠핑을 갔다왔던 남편을 오버스럽다고 쿠사리를 주었지만, 그것은 건강한 이별을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어떤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아직 그 숲에 다다르지 않은 부모들이여, 즐기고 즐기고 또 즐기고 향유하고 후회는 단 한방울도 없이 온몸을 짜내어 만끽하여야한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의 귀결은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받을 것을 기대하지 못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의무만이 남은 존재를 사랑하는 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사춘기는 끝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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