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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Jan 13. 2019

11. 계절을 미리 생각한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여행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유난히 못일어나는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고, 그저 걷기 위해 야심차게 밖으로 나갔다. 꽤 쌀쌀해 후드티의 모자를 쓰고 먹구름가득낀 하늘을 보며 걷는다. 이어폰으로 듣는 라디오앱에서,10월의 첫날이라고 요란한 개시를 해준다. 10월의 첫날이고, 게다가 월요일(4사분기의 첫날) 이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덩달아 나도. '시간이 없다는 것은 최대의 변명이다' 같은 명언을 떠올리기도 하고. 걷다보니 하늘이 잠깐 맑게 개인다. 밤새 악몽을 꿨다는 남편에게 나팔꽃사진을 찍어보냈다. 꽃사진찍으며 아줌마 인증.
흐린 시월의 첫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이번 여름, 유난히 가을이 오지 않을 것 같이 안달내던 내가 있었는데, 이렇게 가을이 왔고,

현실과 기대의 간극만큼이나 그때와 다른 오늘은 안개가 가득하고 겨울냄새가 조금 나는 것도 같은 아침이다. 그때 그 사연을 보낸 사람들은 그 각오가 얼만큼 지켜지고 있을까.


매년 겨울이 오려하면, 늘 떠오르는 이미지 혹은 장면이 있다. 언젠가 한겨울 저녁 군고구마를 굽고 콩나물국을 끓이느라 김으로 뿌얘진 부엌창문. 밖은 추운지 어쩐지  모르고 책을 읽는,우리끼리  안온한 밤.

주말에만 주어지는 그 나른하고도 달콤한 휴식이 그게 그렇게 따뜻하고 좋은 것인줄, 그 때는 알고 있었다. 한창 워킹맘이었을 시절.  오늘은 이른 아침 세수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다가, 모든 날들이 익숙해진 지금, 문득 그게 얼마나 저리도록 소중한 휴식이었었는지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겨울에도,  큰창 아래 앉아 손바닥이 노래지도록 귤을 까먹고 책을 읽겠지. 그 창은 또 김으로  뿌얘져있고 군고구마 굽는 냄새도 날 거고. 호들갑떨며 핫팩을 사놓겠지. 그런데 난 왜 가을에 겨울을  생각하는걸까. 왜 적금을 미리 깨서 쓰듯 겨울엔 봄을,여름엔 가을을 생각할까. 단풍은 아직 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래서는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계절이 현실이 되기 전에 지치는 건지도 모른다. 알랭드 보통 '여행의 기술' 속 소설에 나오는 데제생트 공작이 기차역에 오르기도 전에 실제 여행은 얼마나 피곤할까하면서 자기집으로 돌아가듯이 말이다. 이렇게 계절을 앞서 생각만 하는 방법, 게으른 방법이 아닐까. 계절의 나른한 예지몽. 이제 기대하지 않는 연습, 지금 이 시간을 지금 즐기는 연습을 해 볼까. 겨울을 걱정하지 말고, 지금 여기 눈앞의 빨강을 보자.이번 가을에는, 여행의 기술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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