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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Jan 13. 2019

14. 봄은 늘 처음인것처럼

봄에만 해당되는 기억상실증처럼

지난 봄에는 구례에 산수유를 보고 왔었다. 일타쌍피로, 광양의 매화도. 

남도에는 노란 꽃이, 하얀 꽃이 전등을 켜놓은 듯이 피어있었다. 먹고 살기 바쁠때에는 산수유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몰랐는데, 마치 오로지 봄만을 기다리는 겨울이었던 것처럼 봄을 찾고, 검색해왔다.

시간은 자꾸 빨리만 가는데, 기억은 쌓여만 가는데. 자꾸만 바로 어제 일도, 아까전의 일도 기억을 못하게 되는 횟수가 늘어난다. 그럴수록, 시간이 쌓일수록, 기억하는 것이 쌓일수록, 기억상실증을 겪을수록, 우리는 작년 봄의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 봄은 점점 더 처음이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뒷마당의 파랑새를 찾아나서듯 파랑새들을 찾아 나선다.

오래 마음에 두고 있었던, 김화영 교수의 '청춘의 충격'을 읽는다. 청춘은 청춘인지도 모른 채로, 떠날수있음을 무한 자만하며 떠난다. 그러나, 그 때가 아니면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시간을 공중에 흩뿌렸다. 많은 기억들을 흘려 흘려 보냈다.그 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때에는 그게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아닌 나를 본다. 충격,까지는 아니지만 .

나에게는 첫째아이의 성장속도가 충격이다. '성장의 충격' 이랄까.시간속으로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새로 얻을 것보다는 다시는 오지 않을 어떤 것을 잃어가며 사는 것같아 서늘해진다. 게다가 뭘 특별히 먹인거 같지도 않았는데 반에서 두번째로 크다니.

그렇게 몸집은 커다랗지만 애는 아직도 레고에 빠져살고, 아빠와 스타워즈를 같이 보더니 스타워즈에도 푹 빠졌(고 비싼 레고 스타워즈에도 빠졌)다. 다른 곳에는 흥미없고, (우리나라에는 없는) 레고랜드는 꼭 또 가고 싶다고 하니 몇년전의 말레이시아 레고랜드 방문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았던 건 나의 착각이었다. 그래도 또 속는셈치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아마도 이 때가 아니면 이렇게 갈구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제 더이상 어느 정도의 타지, 타국 생활을 갈망하지않고 그 로망이 희석된 것처럼 말이다. 그때가 아니면, 이때가 아니면. 청춘이 아니면, 유년이 아니면.


산수유마을엔 정말로 소설가 김훈의 묘사대로 산수유꽃이 봄이 꾸는 꿈처럼 하늘과의 경계에 나른하게 꽃안개로 피어있었다.  반곡마을, 평촌마을, 상위마을 등 몇개의 마을이 '서시천'이라 불리는 작은 강을 따라 있고 모두 산수유들이 가득한데, 축제기간엔 하루종일 500원에 이용가능한 셔틀이 각 마을에 내려주니 맨위의 상위마을에서부터 내려오면서 보면 좋다. 특히 가운데쯤 위치한, 넓어지는 물줄기를 둘러싸고 있는 반곡마을이 제일 좋았다. 물을 보자마자 계곡은 언제 가냐고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은 반곡마을 물가 넓은 바위들 위에서 깡총거려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아홉살 둘째는 바위위에 무릎을 안고 앉아있어본다.

걸어내려오며 그 개울가에서 시간처럼 흐르는 물을 잠깐 바라보았다. 때로 느린 유속으로 때로 골짜기를  빠르게 휘돌아가면서, 우리의 시간처럼 흐르고 있었다. 


매화를 보러 광양으로 가기로 한 다음날은 전날과 달리 흐렸다. 편의점 샌드위치와 계란, 쥬스 등을 차에서 먹으며 평소에는 엄두도 안나는 시간인 8시에 출발하는 등 부지런을 떨었으나,역시나 홍쌍리 마을 2km 남겨두고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구례에서 광양으로 가는 길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하동땅을 건너편에 두고 내려내려가는 길인데, 길가에도, 그리고 남도대교와 섬진교를 만나 이어질때까지 강 그 너머로도  매화가 한껏 피어있다. 벚꽃길인줄만 알았는데 매화길이었다. 광양은 매실밭이 많아서, 꼭 홍쌍리마을이 아니더라도 매화가 지천이었다. 매화마을은 꼭 그 마을만 칭하는 건 아니니, 꼭 홍쌍리마을만을 갈 필요는 없어보인다. 1시간여 거북이걸음으로 가다가 홍쌍리마을의 전경이 언덕처럼 한눈에 보였지만 주차하는데만도 30분을 넘길듯하여, 우리는 차를 돌려 이름모를 매화밭에 내린다. 평촌마을, 다압마을, 소학마을등 매화마을 작은 길가에는 때가 때이니하며 동네 사람들이 가판대에서 매화가 핀 매실나무 묘목들을 팔았다. 저번에 거제도에선 동백나무 묘목도 팔더니, 매실나무 묘목이라. 정말 플랜테리어 확산의 증거랄까.

산수유가 봄이 꾸는 꿈처럼 나른하다면, 매화는 흐린 날 그곳만 불이 켜진 것처럼 밝았다. 딸깍, 정신이 든다.


어쨌든 또 이렇게 별탈없이 돌아와서 집에 들어서자, 신나게 매화나무 사이를 뛰어다녔던, 둘째가 말했다. "아, 역시 집이 최고야." 

물론 나도 당연히 안다. 몇시간을 달려 꽃무리를 보는 것만큼, 지척에 있는 꽃나무를 보는 것도 행복이라는 것을. 모여있을 때도 아름답지만 오롯이 하나인 것도 아름답고, 먼 것도 아름답지만 가까운 것도 아름답다는 것을. 그래도 우리는 굳이 멀리서 꽃무리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나야한다, 이 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더 많이 하기 위해, 지척의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 위해, 지척의 꽃향기를 더 깊이 들이마시기위해, 줌아웃하고 또 줌인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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