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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Oct 22. 2023

13.나라는 직업

삐삐삐, 남편이 퇴근해서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한동안 나와 아이들은 제일 먼저 인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달려갔었다. 

그 때 내 구남친이자 현남편은 집에 오면, 나에게 이렇게 물어봐주었다. "별일 없었어? 너만의 시간은 보냈어? 네 인생은 어디 있어?"

우리 부부가 다른 부부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나'에 대해 물어봐주는 것이 아닐까. '나'라는 직업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나는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오늘, 너에 얼마나 충실했냐는 질문을 해주는 사람과 나는 살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여러 역할, 은유적으로 말해서 '직업' 이 있는데, 나에게는 엄마, 딸, 아내 등이 그것이고 또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직업,'나'가 있다. 사람들은 그 '나'라는 직업을 죽을 때까지 바꿀 수 없는, 유일의 직업이라는 것을 쉽게 절감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아직은 너무도 젊은 시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 자체를 실제로 겪은 것이 처음이었다. 내가 거의 최초로 '나'라는 직업의 존재에 대해 자각하게 된 것은 이 때였다. 남겨진 사람의, 상실감에 잠식당한 일상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지만 보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남겨진 사람이 더 또렷이 양각되어 보인 것이었다. 바로 아버님이 '혼자' 살게 되신 것이었다. 수십년 세월을 분신처럼 함께 해온 어떤 이와 생살떼어지듯 떼어져 오롯이 '혼자'로 남는 일. 그때 난 오. 나같으면 하루도 이틀도 못살거야, 숨도 못쉴거야, 나라는 존재는 있지만 이미 없을거야,그건 사는게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잔인하면서도 다행인 일은, 그래도 남은 사람의 삶이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계속 살아가셨다. 당연한 일이다. 나의 엄마가 처음부터 엄마가 아니라 어떤 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처음 하기 쉽지 않듯이, 그 사실이 너무도 낯설지만, 생각해보면 아버님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아버님 자체였고 쭉 아버님이라는 한 사람이었다. 왜 그렇게 생경했을까. 아버님이자 남편이자 아들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

내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해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언제나 '나'로서 나는 존재했다.어떠한 관계들은 소멸되기도 하지만 나와의 관계는 영원히 그 자리에 있다, 다른 관계에 의해 상대적으로 위치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서. 내가 어떤 일들을 겪었고 어떻게 느껴왔고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혼자 있을 때 뭘하는 걸 좋아했는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결코 나에 대해서는 실직하지 않는다. 나이기를 그만둘 수는 없다.

그것은 단순히 취향,호불호 리스트를 늘리는 것, 내가 딸기맛보다는 초코맛 우유를 좋아하고 콩을 싫어하며 오렌지색을 좋아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냐는 것이다. 남에게 알릴 것, 취향이나 태로를 확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소통하는 것, 나의 감정과 행동에 관해 내가 정말 좋아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뭘 할때 제일 행복한지,나는 무엇에 몰입을 했는지, 그것으로부터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지.

그리하여 삐삐,소리가 들릴 때 내가 할 대답이 준비되어 있는지.

어떤 문이 열릴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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