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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Jan 28. 2020

명절 다음날 아침 일개 사피엔스는

 이번 설에는 남편 회사에서 나온 소갈비로 갈비찜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전기밥솥을 활용해보니 과연 고기는 너무도 부드러웠는데 기름을 제거해야함을 놓쳤다. 시금치, 버섯을 넣은 잡채도 하고 도라지를 새콤하게 무쳐서 가져갔다. 

서울인 친정은 몇번의 지옥같은 정체길을 경험하고는 저질체력인 내가 백기청기 들고. 대신 명절당일엔 가지않고 다른 때 여행을 같이 간다.

점차 차례를 지내지않는 집도 많다지만, 아직 안그런 집도 많다. 7만년전부터 호모사피엔스를 결속시키고 진화시켜왔던 그 무형의 '신화'라는 것들은 쉽게는 바뀌지 않는 것이다.


차례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특별히 커피를 아주 천천히 마시기로 한다. 드립을 즐기는 남편이 어느 새 휴일 아침 커피 담당이 되었다. 

여느 때와 똑같은 아침이지만 다른 아침과는 다르게 내심 안도하고 위안하면서 약간은 엄숙한 표정으로,남편이 내려준 커피를 마신다. 예언처럼 오후엔 열도 조금 났다. 명절전 증후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명절후증후군도 있는 듯. 시가 근처에 있는 성심당에 굳이 들러  사온(빵 flex라며ㅎㅎ) 전리품같은, 빵들로 아침을 먹는다.


오로지 삼시세끼를 먹고 치우고 사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듯 방학을 보냈다. 둘째는 내일 개학을 하고, 첫째는 1주일이 더 남았다. 

그런데 문득 이렇게 노동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나도 되는걸까? 생각한다. 물론 나의 노동은 신성하다.이 신성한 노동으로 이렇게 방학이 무탈하게 지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성함 외의 다른, 늘 어제와 다른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이 인간의 오류이리라.  호모사피엔스를 이런 진화의 방향으로 움직인 원동력이 상상력이다, 사회성이다, 뒷담화능력이다 등 설은 많지만 아무래도 지루함을 못참는 것,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바로 그것들을 가능케한 본능이 아닐까.난 정말 이 본능에 충실한 일개 사피엔스일뿐.

( '사피엔스'(유발하라리)를 읽고 있는데,난 절대 이런 류의 책은 사지 않지만, 이런 류의 책을 즐겨사는 남편 덕분에 우리집 책장에 이미 꽂혀있었고 나는 부질없는(?) 도전을 하고 만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책장이 느리게 넘어가는 것 같은 이 책에.)

난 이제 밤늦게까지 와인을 마시면서 가지 않을 도시에 관한 영화를 본다거나, 이를 닦고 나서도 초콜렛을 씹으면서 책을 읽거나, 몇시간동안이나 읽을 책을 검색하다가 결국 아무런 책도 사지 않으면서 밤을 새고 싶은 것이다. 어른거리는 모닥불 주위를 돌며  원시인처럼 밤새 춤을 추고 다음 날 열두시까지 아무 생각 없이 잤으면 좋겠다, 신성함 같은 건 깔고 누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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