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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May 13. 2020

어버이날엔 둘이서

"우리 둘만 나가서 맛있는 저녁 먹고 오자. 어버이날이니까!"

첫째는 용돈을 탕진했다고 두 손놓고 있고 둘째는 아직 놀이터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어버이날 일찍 퇴근한 남편이 그랬다.

남편은 늘 둘이서 어딜 가자고 하는데, 나는 늘 '가족인데 다같이' 주의였고,게다가 다 같이 집에 갇혀 있던 신세로서 어떻게 애들을 놓고 가냐고 했다.그리고 아직은 내가 어버이라기보다는, 부모님께 해야하는 것이 더 크게 느껴지는.


지금껏 학교에서, 방과후에서, 학원에서 지겹도록 많은 종이 카네이션, 카네이션 카드, 카네이션 볼펜을 받아봤으니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학교도 학원도 가지 않은 올해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몇천원 안되는 남은 용돈으로 어버이날 계획을 수첩에 써놓곤 했던 둘째지만 별 기대는 안했다. 진짜 다 내려놓은 줄 알았다.

하필 어버이날에 허리가 아픈 남편이  예약한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간 동안에,일단 다 같이 먹으러 나갈 준비를 하다가, 거울을 보면서 팩트를 톡톡 두드리다가, 갑자기 생각했다. 아무리 코로나 어버이날이라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나. 이것들이! 내가 지금 코로나때문에 대상포진도 걸렸었고 얼마나 힘든데

남편한테 톡을 보냈다. '둘이 가자.'


그러고 나오는데 문앞에 세워진 둘째 자전거의 바구니에 뭔가 하얀 봉다리 봉지가 보였다. 슬쩍 들여다보니 빨간색 카네이션이 2개 보인다. 생화도 아니고 옷핀이 달린 조화. 급하게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온 모양이었다.일단 친구랑 노는게 급하니까 자전거 대놓고 나갔고.

그래도 그게 뭐라고, 갑자기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들에게는 어버이날이니까 엄마아빠만 나간다고 당당히(?) 선언하고, 치킨을 시켜주고  둘이서 숯불갈비를 먹으러 갔다.집근처 늘 가던 식당에 밤거리를 걸어서. ("근데 이거 되려 어린이날 만들어준 거 아니냐?")

원래도 손님이 많은 곳인데, 아뿔싸(?) 어버이날이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온 가족때문에 더욱 붐비는 식당안에서, 두 어버이는 소주 한잔씩을 부딪히며, "근데 있잖아, 우리 둘이서 숯불갈비 먹은 거 14년만인거 같아." 같은 쓸데없는 소리를 홀홀히 해가며, 특히 밤공기를 오랫만에 느끼며 그런 어버이날을 보냈다.


그 카네이션은, 빨리 달고 자야되는데, 모르는 척 기다리고 기다려도 줄 생각이 없다가, 거의 자기 직전에, 겨우 둘째가 기억해낸 덕분에 굳이 우리 두 눈을 감기고 옷 위에 옷핀으로 다는 의식을 치룬 뒤에야, 어버이날은 저물었다. 

그렇게들 어버이날 인증을 해야하나, 싶으면서 결국 굳이 어떤 식으로든 인증을 한번 더 하는 어버이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쩌랴. 첫째의 외계인 얘기를 하품참으며 들어주고, 둘째의 달팽이를 5분마다 봐주고, 개학은 연기되고 있는 이 마당에, 오늘까지만,딱 오늘까지만 우울해하기 위해 한 잔하고 쓰러져자고 싶은데 미처 못한 학교 숙제를 둘째가 내 앞에서 하고 있는 이 마당에.


어버이날엔 둘이서, 둘만의 식사를 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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