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4남매 중의 막내, 남동생의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다. 엄마 없이 치르는 혼사, 인륜지대사, 막내아들의 결혼을 엄마 없이 우리끼리 해내야 했다.
신랑 신부 당사자들끼리 상의하여 혼인 날짜를 잡았다. 결혼식 석 달 전쯤, 친척분들에게 연락해 결혼 소식을 알렸다. 모두들 ‘엄마가 조금만 더 버티셨으면 좋았을걸’ 이라며 아쉬워하셨다. 이모는 또 많이 우셨다.
결혼식 두 달 전쯤, 상견례를 했다. 신부 측 부모님 내외분, 신랑 측에선 아빠와 둘째 언니가 참석했다. 엄마가 있었으면, 자그마치 네 번째 상견례이니, 아주 수월히, 능숙하게, 노련하게, 편안히 즐길 수 있는 적당한 대화와 교양 있는 웃음소리들로 상견례가 채워졌겠지만, 나의 둘째 언니는 말주변이 없었다. 사돈어른들의 말에 그저 네네, 웃기만 잘하고 왔다고 했다. 엄마의 부재는 춥고 시릴 만큼 컸다.
결혼식 한 달 전쯤, 청첩장이 나왔다. 엄마의 수첩에 있는 친척분들 주소를 확인하여 우편발송을 했다. 전화로 청첩장을 보냈다고 인사도 드렸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어 고령의 큰아버지, 큰어머니,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모두, 무탈히 백신을 잘 맞으셨단다. 본인들은 걱정 말고 우리 4남매 건강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다. 감사할 따름이다.
결혼식 3주 전, 예비 올케와 우리 4남매 모두 함께, 엄마가 있는 추모관에 다녀왔다.
엄마의 하나뿐인 며느리가 왔네. 딸 셋 끝에 너무나 귀하게 얻은 엄마의 막내아들,
그 아들이 색시를 데려왔어. 엄마. 감회가 남다르지? 우리끼리 결혼식 잘해볼게. 엄마가 도와줘.
인사를 마치고 추모관을 나섰다.
곧바로 부평 큰아버지댁으로 향했다. 예비신랑신부 데리고 인사 가겠다고 미리 연락을 드려놓았다. 아무리 백신 접종을 마치셨어도 많은 인원이 가는 것은 조심스러워 남동생과 예비 올케, 나와 남편만 동행했다. 가보니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도 오셨다. 조촐히 가길 잘했다. 다과를 먹고, 식사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도 해주지 않은 집안 어른 노릇을, 큰아버지 작은아버지가 든든히 해주셨다. 작은어머니가 꼼꼼히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이분들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다. 크게 감사했다.
이것저것 자잘한 준비들을 마치고,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친척분들도 모두 오셨고, 엄마의 절친 아주머니도 오셨다. 신부 측은 집안의 첫 혼사, 개혼開婚이다 보니, 손님이 많았다. 코로나19 와중에도 식장이 허전하지 않았다. 신랑 어머니 역할은 둘째 언니가 했다. 엄마 대신 신부 어머니와 손을 맞잡고 화촉점화를 했다. 아빠와 나란히 혼주석에 앉았다. 평상시엔 별로 느끼지 못했었는데, 한복을 입고, 올림머리를 한 둘째 언니는, 엄마와 너무나 똑 닮아 보였다. 혼주석에 앉아있는 언니를 보고, 친척분들 모두, 엄마가 앉아있는 줄 알았다며 놀라셨다.
결혼식 당일에 나는 아빠를 아주 오랜만에 뵈었다. 언제 봤었나. 나의 결혼식 때 보고 처음인가. 딱히 기억을 더듬어 보고 싶지도 않다. 아빠는 80의 나이에도 매우 정정하셨다. 식사를 너무나 잘하셨고, 목소리도 우렁차셨다. 코로나19로 인해 가족들과 하객들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였지만, 혼주와 신랑 신부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아빠는 굳이 굳이 마스크를 써야겠다며 고집을 피우셨다. 둘째 언니가 옆에서 열심히 달래어 아빠는 마스크를 벗으셨다. 그 고집 여전하시구나. 아직도 참으로 강건하시구나. 싶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 전인 듯하다. 엄마와 남동생과 나는 친한 동네 친구 집에 놀러 갔었다. 그 친구와 나와 남동생은 마당에서 놀고 엄마와 친구의 엄마는 우리를 지켜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던 것 같다. 그 시절, 어른들은, 애들이 불장난하면 오줌 싼다고 겁을 주셨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겁을 주건 말건, 나와 친구와 남동생은 마당에서 불장난을 했다. 그때는 집마다 성냥이 있었다. 육각형 모양의 상자에 빼곡히 들어있는 성냥은 불장난하기 참 좋았다. 엄마 몰래 불장난을 한창 즐기고 있을 무렵, 남동생이 바지에 오줌을 쌌다. 그때 남동생은 아마도 세살 네살쯤 됐었던 것 같다. 성냥불을 보고 놀랬던 걸까? 울지는 않았는데, 난데없이 남동생이 오줌을 쌌다. 달려온 엄마한테 나는 아주 혼쭐이 났다. 누나라는 게 위험하게 동생이랑 불장난이나 하냐며 아주 된통 혼났다. 나도 나름 꾀나 놀랐다. 흥칫뿡 하며 듣던 어른들의 말이, 내 앞에서 현실이 되었으니, 놀랄 만도 하지. 그 이후로 나는 절대, 불장난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삼십몇년쯤 흘러, 불장난에 놀라 오줌 싸던 남동생이 결혼을 했다. 장성하여 가정을 꾸렸다. 문득, 기분이 묘했다. 마냥 어리기만 했던 남동생이, 대학입시를 고민하고, 취업난에 허덕이고, 여자 꼬시는데 써먹을 거라며 나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남동생이, 한 여자의 남편이 되다니. 장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뭔가 아련해지기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너무 많이 보고 싶었다.
단 한 번도, 엄마 없는 남동생의 결혼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엄마의 백혈병 투병 중에도, 엄마가 이토록 빨리 떠나게 되어, 결국, 우리끼리 남동생의 결혼을 치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다. 코로나19로 온 가족과 하객들이 모두, 마스크를 쓴 채로 사진 촬영을 하게 될 줄도, 정말 정말 몰랐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무언가 결정의 순간이 닥쳤을 때, 나는, 엄마 생각을 했다.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엄마라면 올케에게 무얼 해줬을까. 엄마라면 뭐라고 했을까. 엄마라면 어떻게 인사를 드렸을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답이 나왔다. 결정이 쉬워졌다. 그리고 그 선택들은 비교적 적절했다. 물론 아쉬움도 많았고, 아차 싶은 것도 있었지만, 엄마를 생각하며, 막내아들의 결혼식을 잘 마쳤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무사히 잘 다녀오고, 올케의 친정식구들, 우리 4남매 가족들 모두, 각자 식사도 잘 마쳤다. 그리고 그다음 주, 바로, 서울은 5백명대의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거리두기 4단계가 시작되었다. 아. 정말이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코로나19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었다. 무탈히 잘 넘길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지 싶었다. 모두 엄마가 도와준 덕이겠지. 엄마가 우리를 지켜준 덕이겠지.
엄마.
엄마가 있었으면, 하나밖에 없는 귀한 며느리, 정말 잘해줬을 텐데. 엄마도 많이 아쉽지?
엄마 대신, 우리가 잘 챙겨줄게. 귀한 며느리, 맘고생하지 않게, 잘 다독여줄게.
엄마가 못 키워 늘 애잔했던, 엄마의 아픈 손가락 막내아들,
올케랑 알콩달콩 백년해로할 수 있게, 옆에서 잘 돌봐줄게.
엄마도 늘 함께 해줘. 언제나 어디서나, 늘 함께해줘.
엄마,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