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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Dec 15. 2022

겨울의 맛

뭐니 뭐니 해도 뜨끈한 바닥과 함께,



날씨도 흐리고 컨디션도 좋지 않아 괜히 축축 처지는 오후다. 밥맛이 없어 겨우 카레를 만들어 딸아이를 먹이고 몇 수저 뜨다 말고 집을 나섰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 거리며 큰길 세 개를 건너 출근했다. 며칠간 아프단 핑계로 글쓰기도 미뤄놓고 뒷전에 두었던 책도 있었는데, 글쓰기 하나를 마치고 나니 없는 짬도 내어 다시 부지런히 움직여봐야지, 다짐하게 된다.



오늘은 수업 전 한 시간 남짓 여유가 있는 날이라 의자보다 따끈한 바닥에 앉아 등을 기대고는 책장을 넘겼다. 이른 오후의 적막이 낯설지만 오랜만에 부리는 여유가 책장을 절로 넘긴다. 역시 뜻밖의 즐거움은 언제나 반갑다.

공교롭게도 수업할 남자 친구 둘이 결석이다. 출석할 다른 한 친구도 늦게 도착하는 날이라 수업이 여의치 않았다. 20-30분 남짓이지만 내가 느낀 자리의 온기를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동의를 구하고 함께 책 읽는 시간을 가졌다. 각자 원하는 책 두 권씩을 들고 와서 벽에 등을 기대기도 했다가, 엉덩이가 뜨거워졌는지 배를 대고 눕기도 했다가. 그래도 하나같이 편안한 자세로 겨울 그 특유의 온기를 느끼며 책을 읽는다.

가정집을 학원으로 쓰고 있는 덕분에 누릴 수 있는 호사랄까. 겨울이 되면 집보다 이곳이 더 좋다는 말이 절로 난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 오를 때 바닥에 느껴지는 뜨끈함은 아파트에 사는 내가 자주 느끼기 힘든 것이다. 더군다나 내 방(실제론 교실)은 작지만 보일러가 가장 뜨끈하게 잘 도는 곳이라 배를 깔고 누우면 마치 시골 할머니 댁에 누워 온돌 찜질을 하는 것 같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 댁 모습은 여전하다. 바로 지금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뜨끈뜨끈 하다못해 장판이 탈 지경에 이르는, 그래도 그 맛이 좋아 두툼한 누비이불을 깔고 그 아랫목에 누워 지내던 겨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간식시간이다. 이제 그만 간식을 먹으러 가면 된다는 말에도 “잠깐만요, 조금만 더!”를 외치는 아이들의 눈빛이 사랑스럽다. 결국 남은 페이지를 다 읽고서야 자리를 뜬다. 왠지 오늘은 내 마음이 이 아이들에게도 다 전해진 것 같아 마음이 뜨거워진다. 제 옷을 배와 엉덩이에 내어주고서라도 그 뜨끈한 온도를 사수하며 겨울의 맛을 제대로 느끼는 아이들이 된 것 같아서. 



배가 뜨뜻하고 엉덩이가 따뜻해서 더 좋은, 책 읽는 오후의 설렘은 분명 이런 것일 테다. 노곤한 마음을 달래주고 책 속에 흠뻑 빠질 여유도 가져다준다. 지금은 비록 절절 끓는 방바닥에 엉덩이만 대고 노는 어린 송아지 같지만, 부디 앉은자리의 온기를 오래 기억하는 알찬 이가 되면 좋겠다. 여름에는 내 방 근처엔 오려고 하지도 않다가 이제는 자꾸만 내 방 문을 닫고 그 안에 머무르려는 아이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구석구석 따뜻한 자리를 찾아 뒹굴고, 또 마주 앉아 나누는 저희들끼리의 대화가 부디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나는 나대로 출근해서 삼십 분 남짓 가능한 오후의 책 타임을 계속해서 즐겨야겠다. 왠지 이번 겨울 내 소소한 즐거움이 될 것 같다. 겨울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뜨끈한 바닥에 온몸을 지지는 일일 테니까. 겨울은 싫지만 좋아하는 것이 모두 모인 그 자리는 또 그런대로 겨울의 들큼한 맛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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