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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Jun 19. 2018

그녀의 배신

황금 같은 일요일, 출근을 했다. 회사에 잠깐 들러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상 근무와 다름없었다. 일요일에 출근을 했다는 마음의 무게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촬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바짝 긴장을 해서인지 평일보다 더 피곤했다. 휴직기간 동안 가족 중심의 소규모 인간관계 속에서 살다가 출연자 8명과 여러 명의 스태프들을 동시에 상대하며 낯선 사람들 속에서 웃고 있어야 하는 것도 피곤했다. 오랜만에 현장에서 느끼는 활기와 긴장도 그 마음의 크기만큼 나를 지치게 했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쉬었다 가고 싶었다. 시원한 아메리카노로 묵직한 머리를 깨우고 싶었고 달달한 바닐라라테로 가라앉는 마음을 끌어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내게 그리운 것은 아이였다. 하이디를 만나면 쉬지도 못하고 놀아줘야 할 텐데 학교 독서 숙제도 안 해서 같이 책도 읽어야 하는데. 더 피곤해질 상황들이 그려졌지만 그래도 아이가 보고 싶었다. 일요일에도 엄마를 차지하지 못한 아이가 안쓰러웠다. 곧 도착한다는 버스. 정류장으로 달렸다. 


버스는 한 번에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지 않았다. 한 번의 환승. 다시 한번 마음은 흔들렸다. 정류장마저 나무 의자로 내 마음을 자극했다. 털썩 주저앉았다. 카카오맵을 열어 환승할 버스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냥 앉아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옆 자리에 앉은 여중생이 뒷자리에 앉은 친구 두 명과 함께 어찌나 시끄럽게 수다를 떠는지. 왜 그렇게 비속어를 쓰는지. 잠깐이라도 자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탓했다. 오히려 더 피곤해졌다며 그래서 더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이에게 향하는 내 마음을 이길 수는 없었다.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일요일 출근을 앞두고 토요일은 아이랑 하루종일 외출!

아이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도 좀 누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두 시간이 지나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고 했다.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역시나 아이는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뒤척인다. 나를 보면 반가워할 줄 알았고 벌떡 일어나 "엄마"하고 소리칠 줄 알았는데 하이디는 나를 보더니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한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라고 한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아무리 자다 깨서라지만 울기까지 한다. 


평소 나는 아이에게 TV를 보지 말라하고 아빠는 아이에게 TV를 보여준다. 평소 나는 아이에게 일기 써라, 숙제해라, 연산 문제 엄마랑 풀자 잔소리를 하지만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없이 아빠랑 단 둘이 남겨지는 날을 부녀는 자유의 날이라고 부른다. 아이의 반응을 보고 남편에게 제일 먼저 물었던 말은 오늘 보기로 했던 캐리 TV를 봤느냐였다. 혹시 다 못 봐서 내가 못 보게 할까 봐 그런 것일까. 1시간 30분이나 봤다고 했다. 그것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럼 왜 저러는 것일까. 


아이는 저녁도 먹기 싫고 엄마랑 화해도 하기 싫고 엄마에게 삐쳤다며 쉽게 눈물을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이를 달래던 나도 아이가 스스로 마음을 풀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이의 말에 기운이 빠져 더 어찌할 힘도 없었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아내와 트램펄린에 누워 눈물을 닦고 있는 딸을 보던 남편이 중재안을 제시한다. 아내에게는 요리할 힘도 없을 테니 외식을 하러 가자는 제안, 울고 있는 딸에게는 식당에 가서 유튜브를 보여주겠다는 제안. 평소에 볼 기회가 거의 없는 유튜브. 아이는 벌떡 일어난다. 눈물을 닦고 엄마랑 화해를 하겠다고 한다. 아, 유튜브에 밀렸다. 유튜브보다 안 반가운 엄마. 이건 딸의 배신이다. 




그녀의 배신, 그 뒷이야기 : https://brunch.co.kr/@lucidjudge/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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