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밍아웃은 했지만

선물 007 작전은 계속 된다

by 여유수집가

내게 한껏 짜증을 내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열두 살 딸은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짜증 내서 미안해. 내가 요즘 짜증을 좀 많이 냈지? 짜증 많이 냈다고 산타할아버지가 안 오실까?”

크리스마스가 한 달 남짓 남은 날이었다.

“한 달 정도 남았으니까 한 달 동안은 착한 어린이 되면 오시겠지.”


긴장이 풀린 아이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나는 잽싸게 산타 스파이가 됐다.


“무슨 선물이 받고 싶은데?”


눈을 반짝이며 신중하게 세 가지 선물 후보를 말하는 아이. 하나로 딱 정해주면 좋겠지만 아직 한 달이 남았음에 안심하며 세 가지 선물 목록을 기억했다. 세 가지 모두 그리 비싸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보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이는 여러 번 마음을 바꿨다. 어느 날은 1번 선물이, 어느 날은 2번 선물이, 어느 날은 3번 선물이 받고 싶다고 했다. 여기는 물건이 바다 건너 배송되는 제주라 미리 주문해야 마음이 놓이기에 아이를 살살 꾀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전 세계 어린이 선물을 다 준비하시려면 얼마나 정신없으시겠어. 니가 자꾸 마음을 바꾸면 더 정신없어하실걸? 어서 하나로 정해서 부탁드려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산타를 철석같이 믿는 아이는 언제까지 선물을 정해야 하냐며 초조해했고, 나는 열흘 전이면 괜찮을 것 같다며 산타 마음을 헤아리는 멋진 엄마로 포장해 내 마음을 전했다. 그렇게 정해진 아이의 선물은 ‘산리오 시크릿 귀욤템 키링 한 박스’였다. 1번 선물과 2번 선물은 모두 책이었는데 내 마음에 제일 들지 않는 선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바라는 선물인 '산리오 시크릿 귀욤템 키링 한 박스'에는 스물다섯 개의 키링이 들어있었지만, 아이는 한 박스에 정확히 몇 개가 들어있는지까지는 몰랐다.


“너 이렇게 또 짜증 내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실 텐데 어떻게 할래?”

“그래도 내가 요즘 착한 일도 하긴 했는데...”

“그럼 키링을 한 개만 주실지도 모르지.”


볼이 발개진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은 여러 개를 받아 하나씩 언박싱하는 재미를 느끼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키링을 달고 가고 싶은 건데 한 개만 주시면 어떻게 하냐고. 그렇게 자신이 짜증을 많이 낸 거냐며. 눈물까지 보일지 몰랐던 나는 엄마 생각이 그런 거고 산타할아버지의 마음은 나도 모른다며 서둘러 수습하니 눈물 고인 눈이 이번에는 날카롭게 내게 닿았다.

“나도 짜증 내서 반성하고 있었는데 산타할아버지 마음도 모르면서 엄마가 지금 나 협박한 거지?”


협박하지 않겠노라 사과했지만 그때부터 아이는 궁금해했다. 산타할아버지는 도대체 몇 개의 키링을 선물로 주실지. 그렇다고 스물다섯 개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소박한 아이는 열 개면 정말 좋겠고, 다섯 개여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오전, 아이가 침대 헤드에 흰 종이를 가져다 뒀다. 뒤집어서 두길래 뭐냐고 물었더니 산타할아버지께 쓴 편지라고 했다. 나보고 보지 말라고. 아이 몰래 볼 생각에 그러겠다고 답하고는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쭈뼛거리는 아이가 느껴졌다.


“왜? 엄마한테 할 말 있어서 그래?”

“엄마, 혹시... 엄마가 산타야?”


올 것이 왔구나. 아이는 손톱의 거스러미를 뜯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했더니 친구들 이름이 등장했다. 친구들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그렇게 말했다고. 손톱을 뜯지 말라고 말하며 아이를 안아 줬다. 그리고 때가 된 진실을 밝혔다.


“응, 엄마가 산타 맞아. 산타할아버지가 없는 건 아니고 산타할아버지가 엄마한테 알려주시는 거야. 하이디가 올해 착한 어린이였으니 선물을 주라고. 예수님이 엄마를 하이디에게 보내서 하이디를 살펴주라고 하신 것처럼 산타할아버지도 그러시는 거야.”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는 물었다.


“엄마는 내가 엄마한테 짜증을 제일 많이 냈는데도 착한 어린이라고 생각했어?”


짜증을 냈지만 후회했고 사과했으니 착한 어린이가 맞다고. 엄마도 짜증을 낼 때가 있지 않냐고. 누구나 짜증을 낼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 사과할 마음과 용기를 내면 짜증도 착한 마음으로 바뀔 수 있다고.


아이는 엄마가 몇 개의 키링을 샀는지 궁금하지만 묻지 않겠다고 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니까. 하지만 씰룩이던 입술은 결국 한 가지를 물었다. ‘한 개는 아니지?’라고. 열 개를 사둔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산타가 엄마임을 알아버린 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딸

순수하게 산타를 믿던 아이가 하나의 껍질을 깼다. 현실을 조금씩 깨우쳐가는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했고, 배신감 난무하지 않고 따뜻하게 산밍하웃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물론 더는 선물 007 작전을 진행하지 않아도 되는 나는 홀가분했다. 하지만 궁금하면서도 선물을 기다릴 줄 아는 아이는 내게 스파이 노릇을 그만두지 못하게 했다.


“엄마, 그래도 기다리는 재미가 있으니까 내년에도 선물은 몰래 준비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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