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작 이야기 공방 2
오늘도 아이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인다.
이번엔 무엇을 만들지 늘 궁금하게 만든다.
"할아버지 슬리퍼를 만들거야."
'할아버지'라는 단어에
주방에서 집안일로 바삐 움직이던 내 손이 멈춘다.
"좋은 생각이야! 할아버지가 엄청 좋아하시겠네."
키는 작지만 다부지고
한눈에 봐도 듬직해 보이는 겉모습에
세월이 사뿐 내려앉은 온유하고 인자해 보이는 얼굴
허허 웃음을 터트리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
순간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시지만,
이내 머쓱해하며 미안한듯 말을 아끼시는 모습들까지
소중한 편지처럼 한쪽에 고이 접어두었던
아버님에 대한 내 기억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아버님은 항상 건강하셨다ㆍ
아버님을 표현하는 키워드를 꼽는다면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제일 먼저 '건강'이라고 할만큼
자기 관리를 젋은 사람 못지않게 잘하시는 분이셨다.
어머님께 전해 들은 아버님의 하루일과는 이러했다.
새벽 4시반이면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
작은 스탠드에 불을 밝히고 차분히 책을 읽으셨고
늘 같은 시간에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천초목 속에서 산책을 하고
틈틈히 잊지 않고 체력관리를 위해 운동을 하셨다.
또한 모든 음식을 골고루 맛있게 잘 드셨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마음을 놓았는지도 모른다.
무쇠같은 아버님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거라는
깊은 믿음이 가족들의 마음 속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굳은 믿음은
종이컵으로 쌓아올린 어설픈 성처럼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ㆍ
"암 4기라네ᆢ"
'믿을 수 없는 통보를
물기없는 마른 수건같은 먹먹함으로 전한다.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신랑의 목소리에
그런 말도 안되는 거짓말하지 말라며 당황했다.
한동안 머릿속이 공허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진일거라는 생각으로 애써 마음을 추스려 보았다.
하지만 시누이와 통화하며
애써 눌러왔던 감정과 눈물이 욀칵 쏟아졌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청군과 백군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같은
아버님의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제천에 사시던 아버님은
치료를 위해 어머님과 함께
한달에 1~2번씩 우리집에 와서 계셨다.
병원에 다녀온 날 저녁엔
시험 결과지를 받아볼 긴장된 아이의 마음처럼
우리 모두는 치료 경과를 듣고
때론 바짝 긴장했고 또 때론 안도했으며
가족들 모두 한마음이 되어
아버님이 잘 이겨내시길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지내시면서 불편한 부분이 있을지 살피고
서툰 음식 솜씨로 이번에는 어떤 건강한 음식을 해드릴지
고민하며 요리책을 뒤적이고 인터넷을 수없이 검색하는
나날이 한달 한달 더해져갔다.
그즈음 아이가 할아버지를 위한
양말목 슬리퍼를 만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어떤 색깔 좋아하세요?"
"할아버지 여기 종이에 발을 대보세요."
종이에 조심 조심 발모양을 따라서 그려낸다.
색깔과 크기를 알아보고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 실내화를 만든다.
세심하게 만들어나가던 아이의 정성스런 예쁜 마음이
따뜻한 선물로 완성되었다.
아버님은 손녀의 선물을 받고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실내화를 신고 겨울을 몆해는 더 거뜬히 지내실거라며
입가에 웃음이 가득하셨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따뜻한 봄날은 아니었다.
깨질듯한 두통은 잊을듯 하면
이따금 한번씩 찾아와 아버님을 괴롭혔다.
간암은 어느순간 뇌로 전이되었고 ,
낙엽이 울긋불긋 초록에 고운 색을 더해가던
아름다운 그 가을의 초입에
아버님은 결국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가셨다.
공직자로 평생을 사시면서 늘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마음 아파하며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주셨다.
약지 못한 성격으로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정당하지 못한 일은 앞뒤 재지 않고
앞에 나서서 척척 해결해 나가셨다.
본인이 안쓰고 안먹더라도 손자손녀에게는
진심으로 모든 것을 내어줄만큼 무한 사랑을 주셨다.
아버님의 마지막 얼굴은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다.
아이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따뜻한 슬리퍼를 신고
모든 걱정과 아품을 훌훌 털어버리고
사뿐 사뿐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셨겠지.
아버님의 맑고 바른 인성을
아이들이 고스란이 받을 수 있기를
오늘도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 속 깊이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