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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싹이 텄다

영상 번역 에디터 여정의 시작

by 루씨


올해 1월부터 번역가 여정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번역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업계를 알아가며 지치지 않도록, 또 꾸준히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 실력에 대한 자신감보다 의심이 더 컸기에, 도전하기보다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핑계로 공부만 하며 회피하는 순간들도 있었다. 번역은 정답이 없는 일이다. 혼자 공부하다 보면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결국 내 실력이 업계에서 통하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샘플 테스트를 보면서 실력을 검증하는 수밖에.



떨어질지 두려워, 혹은 되더라도 실력이 들통날까 두려워 도전을 망설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걸어왔다. 그래서 맘을 다잡고 눈에 밟히는 대로 번역 에이전시에 이력서를 돌리고 샘플테스트를 치렀다. 1분 영상 번역에 5-6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이런 시간이 언젠가는 복리처럼 돌아올 거라고 믿으며 꾸준히 이어갔다.



마케팅 번역, 영상 번역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리다 보니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합격과 불합격 소식을 받고, 낯선 번호에 설레기를 몇 차례 반복하던 어느 날, 지원했던 영화 수입사에서 면접을 보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포지션은 영상 번역 에디터. 영화 수입사에서의 영상 번역 경력은 언젠가 꼭 쌓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놓칠 수가 없었다.



면접을 앞두고 두근거리는 마음.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일을 현실 속에서 체험해 나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도파민 폭발이다. 설렘에 떨리다가도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괴로워지기도 한다. 특히, 나는 자기 의심이 큰 편이라, 스스로에게 주문하듯 되뇌었다.



“나는 충분히 준비했어.”



면접 당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잠시 접어두었다. 대신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지금껏 쌓아온 경력과 경험을 모두 털어놓기로 했다.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전하며, 간절함이 면접관에게 통하기만을 기대할 뿐이었다.



진심이 통한 걸까. 나는 1차 면접을 거쳐 최종 면접까지 통과했고, 이제 다음 달 출근을 앞두고 있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일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는 듯한 기분에 온몸의 긴장이 풀린다.



번역 공부를 하면서 수많은 방향을 탐색했다. 처음에는 마케팅 번역으로 입문했다가, 출판 번역, 그리고 영상 번역까지 거쳐왔다. 내가 꾸준히 잘할 수 있는 번역이 뭐가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내 일상을 돌아보게 되었고, 영상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초딩 때 프리즌 브레이크로 미드에 빠졌던 나는 이제 영상 번역 업계에 발을 들였다. 앞으로 질리도록 영상을 보게 될 거란 복선 같은 것이었을까?



물론 정규직으로 다시 직장 생활을 하게 될 테지만, 이전 경험에서 배운 것을 발판 삼아 이번에는 초반에 열정을 불태워 빠르게 나를 소모했던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단지 앞으로 가게 될 영상 번역가의 여정에서 수많은 도전과 벽 앞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나만의 연료를 비축하며 돌파구를 찾아나갈 수 있도록 다시금 스스로를 다잡기로 했다.



앞으로 배우게 될 영상 콘텐츠 산업의 이야기, 질리도록 보게 될 영상들, 번역문을 다듬으며 익히게 될 영어와 한국어의 이야기를 여기에도 차곡히 쌓아나갈 생각이다. 오늘의 기록이 먼 훗날 나에게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며칠 전부터 키우기 시작한 토마토 화분에서 첫 새싹이 났다. 보이지 않던 토마토 씨앗의 몸부림이 이제 흙 밖으로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하필, 최종 면접 합격 소식을 받은 당일에 토마토 새싹이 올라오니 괜스레 뭉클해졌다. 앞으로도 토마토 새싹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물과 애정을 듬뿍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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