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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Nov 11. 2022

일상의 논어 <자한子罕10>-욕파불능欲罷不能


顔淵 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 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안연 위연탄왈 앙지미고 찬지미견 첨지재전 홀언재후 부자 순순연선유인 박아이문 약아이례 욕파불능 기경오재 여유소립탁이 수욕종지 말유야이


-안연이 한숨을 쉬며 크게 탄식하고 말했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파고들수록 더욱 단단하며, 바라보면 앞에 계시다가 홀연히 뒤에 머무신다. 스승님은 차례대로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인도하신다. 학문으로 우리를 넓혀 주시고 예로 우리를 바로잡아 주시니,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가 없다. 이미 나의 재주를 다했는데도 서 계신 곳이 높고도 머니, 비록 따르고자 하나 따라갈 도리가 없을 따름이다."              



제자로부터 이 정도의 찬사를 듣는 스승이라면 가르친 보람이 있겠지요. 그뿐 아니라 인생을 헛살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밀려올 듯합니다. 공자가 왜 안회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공자가 안회를 인정했듯 안회 역시 공자를 알아준 제자였기 때문이지요.  


'앙지미고 찬지미견'이 공자의 학문적 경지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임을 얘기한다면, '첨지재전 홀언재후'는 앞에서 동기부여하며 이끌어 주다가 슬럼프에 빠지면 어느새 뒤에서 격려하며 기운을 북돋는 인간적 리더십을 갖춘 스승의 면모를 잘 보여 줍니다.   


'욕파불능'이라는 표현에서 제자들이 힘에 부쳐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조차 '끝까지 스승과 함께하며 스승이 도달한 지점까지 나아가 보고 싶다'는 결의를 다지게 만들 정도로 공자의 학식과 인품이 매력적인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제자라면 '나도 저 높이에 올라 세상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갖는 것이 당연하지요. 


우리는 좋은 스승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청출어람이 되어야 하지요. 좋은 스승이라면 자신보다 제자들이 더 깊고 높은 존재가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과의 결별도 기꺼운 마음으로 수용할 테지요. 스승은 맹종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학문의 발전은 언제나 선행자들의 이론과 학설에 대한 회의와 비판, 새로운 주장의 개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후학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고 비판 받는 스승이야말로 일가를 이룬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모든 성취와 한계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떠나서 평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시대와 육체를 떠나서 해석될 수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래서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지요. 삶의 목적과 이상 없이 돈과 권력 만을 좇는 자들에게는 자기 인생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 인간의 생이란 타자들과의 관계 맺음을 통한 육체의 해방과 시대와의 소통을 통한 정신의 확장을 통해 존재 의의를 확보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돈과 권력이라는 즉물적 지표의 획득에 성공한 개인에 자신의 삶의 목표를 투영하는 한 '일차원적 인간(마르쿠제)'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내용이 아니라 돈과 권력이라는 결과로 인생을 평가하는 자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자기'와 '인생'의 개념이 확립될 리 만무합니다. 먹고 마시고 빼앗고 축적하고 억압하고 지배하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동물적 존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가 언론을 통해 조장하는 허위의식과 소비의 쾌락에 젖어 비판 정신을 상실한 채 여전히 전체주의적 사고에 함몰된 자들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일차원적 인간들이 다차원적 인간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말살하려는 신 전체주의 시대에 인간답게 살아가는 일은 만만치 않기만 합니다. 그러나 힘들어서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사표가 되는 위대한 스승들이 있고 저마다 '자기 인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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