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8. 진희

by 오종호

날이 화창했다. 새들은 무슨 즐거운 일이 그리 많은지 신명나게 지저귀며 날아다녔다. 공원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쾌청한 날의 햇살과 공기를 즐기고 있었다.


통화하면서 걷고 있는 이페에게 축구공이 굴러왔다. 멀리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공을 차 달라고 소리쳤다. 이페가 공을 툭 차서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굴렸다. 아이들은 다시 공을 향해 먹이를 발견한 개미떼처럼 몰려 들었다.


이페는 벤치에 앉았다. 벤치 끝에 한 여자 아이가 앉아 있었다.  


“하여간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전에 끝내주는 결말까지, 특히 이번 소설은 대사가 특별히 좋더라구요. 뭐랄까, 펄떡이는 활어 느낌이랄까? 하여간 회사 내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거 봐요, 다 할 수 있는 분이. 역시 로맨스 소설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이페 작가답습니다. 하하하. 이번에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단행본 출간되면 한 잔 합시다. 그럼.”

“네.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이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벤치에 내려 놓았다. 심호흡을 하며 폐부 깊숙이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자 기분이 한결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제서야 미리 앉아 있던 여자아이가 눈에 제대로 들어왔는지 이페는 말을 걸었다. 


“안녕? 아저씨가 주인 있는 자리에 허락 없이 앉아서 미안하구나. 통화하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괜찮아요, 제 것도 아닌데요.”


아이가 힐끗 곁눈질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식구들 하고 같이 나왔니?”

“아뇨. 혼자 바람 쐬러 나왔어요.”

“오늘같이 날씨 좋은 주말에 식구들 하고 놀러 가지 않고?”

“귀찮아서요. 전 그냥 혼자가 좋아요.”


이페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지 아이는 여기저기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니?”

“아뇨. 근데 아저씨는 남의 일에 관심이 많네요. 말도 많구요.”


아이가 이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차게 말했다. 이페는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눈길을 받았다.


“아, 내가 그랬나? 기분 나빴다면 미안……. 그리고 주인 있는 벤치에 앉은 것도 미안.”

“괜찮다니까요.”

“아, 참 그랬지……. 이름이 뭐니?”

“진희요.”

“진희?”

“그냥 진희요.”

“그, 그래. 그냥 진희. 근데 뭐하고 있었니?”

“독서요.” 


진희가 책을 돌려 표지를 보여 주었다. 『철학하는 날의 즐거움』이라고 씌어 있었다.


“어려운 책을 읽는구나.”

“언니가 읽던 책인데 재미있어 보여서요. 그럭저럭 읽을 만 해요.”

“어떤 점이 재미있어 보였는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페가 물었다. 진희가 귀찮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좀 읽어 봤는데 여러 일상적 주제에 대해서 과거의 철학자들이 마치 실존해 있는 것처럼 한데 모여 토론하는 방식이라서 재미있어요. 철학자들의 개성이 저마다 물씬 드러나기도 하고. 일반 독자들이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는 철학을 아주 쉽게 풀어냈어요.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생각과 행동에 이미 과거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던 철학이 다 들어 있다는 점을 깨우치죠. 이미 우리는 철학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그 점을 좀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살면 삶이 즐거워진다는 얘긴데. 독특한 기획이죠.”

“그, 그렇구나. 너 꽤나 똑똑한 걸? 내용이 다 이해되는 거야?”

“때로는 공감할 수 없는 얘기들도 있죠. 사람마다 세상을 바라보며 해석하고 수용하는 방식이 다 다르니까요. 시대적 상황, 인간 관계, 특별한 인연, 개인적 기질, 성향 등에 따라 철학자들의 사유도 전부 제각각이에요. 그런데 사실 다르다는 점이 포인트죠. 이 책은 결국 누구나 다른데 뭐가 어떻게 다르냐, 다른 게 정말 다른 거냐를 보여 줘요. 매력적이죠.”

“대단하구나. 특별히 좋아하는 철학자는 누구니?”

“이지요.”

“이지?”

“이탁오라고도 하죠.”

“처음 듣는 철학자네.”

“중국 사람이죠.”

“그 철학자를 왜 좋아하는데?”

“이단아라서요. 당대 주자학의 한계를 명징하게 짚어냈죠. 그리고 여성을 존중하는 남자였기 때문이기도 해요. 몇 백 년을 앞서간 사람인 거죠.”

“음…… 대단하구나, 진희야. 다 읽고 아저씨도 빌려 줄 수 있겠니?” 

이페의 말에 진희가 이페의 얼굴을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요, 그럼. 자요.”

“어? 너 다 읽은 거야?”

“그냥 아저씨 먼저 읽으라고 주는 거에요.”

“그래? 고맙구나. 언제 돌려주면 되겠니?”

“일주일 정도면 다 읽을 수 있겠죠? 담주 토요일 이 시각에 여기서 돌려주는 걸루 해요. 괜찮죠?”

“그래. 토요일. 그렇게 하자꾸나.”

“그럼 저 먼저 갈게요. 안녕 아저씨.”

“그래, 안녕.”


‘작은 새가 쉴새 없이 지저귀는 느낌이 난다. 진희는 그러고 보니 정우라는 녀석과도 닮은 데가 있군.’


떠나는 진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페는 생각했다. 정우의 말이 떠올랐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생존하고 생활하기 위해 일상에 갇혀 지내는 것. 그것을 넘어설 유일한 방법이 사유이니 철학자들은 그토록 집요하게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탐구한 것인지도 모르죠. 육체는 얽매여 있더라도 정신은 우주를 헤엄치다 돌아오는 것. 일상의 밖에서 일상을 바라보면 또 그런 분주한 일상에 끼어들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인간의 고통이 있죠. 마치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우주정거장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그러다 문득 다음주 토요일을 생각하다 자신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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