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하게 갠 날씨. 로니카는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강아지를 산책 시키는 아줌마와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노인들 몇이 보였다.
도로 건너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로니카는 책 읽기를 멈추고 먼 하늘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체념한 듯 가방을 열어 도시락을 꺼냈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 음식 하나를 집어 먹기 시작하려는 찰나 뒤에서 정우가 앞으로 몸을 쑥 내밀었다.
정우는 아무 말 없이 블루투스 이어폰 한쪽을 로니카의 귀에 꼽아 주었다. 로니카의 눈을 바라보는 정우. 정우의 눈을 바라보는 로니카. 음악이 진행될수록 감정이 격해지는지 로니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로니카는 눈물이 떨어진 음식을 입에 넣고 계속 울었다. 음악이 멈추자 정우가 로니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텅 빈 도시락.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차며 놀던 공이 정우 쪽으로 굴러왔다. 정우는 벤치에서 일어나 힘차게 공을 차서 아이들에게 돌려 보내 주었다.
이페는 열린 창 틈으로 바깥 공기를 마시며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페의 시선은 아무 데로나 달려가서 여기저기 닿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이페 작가, 접니다.”
“네, 안녕하세요.”
“카톡 보셨죠?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모레 기획사 작가들 첫 모임 있는 거 아시죠? 간만에 저하고 회포 한 번 풉시다. 이번엔 빼지 말고 꼭 참석하세요. 다른 작가들 서운해 해요. 늦더라도 꼭 오세요. 아셨죠?”
“예, 알겠습니다.”
카톡이 왔다. 로니카였다.
-부탁이 있는데 들어 줄래요?’
-뭔데요?
-여행가고 싶은데 같이 가 줄래요?
-여행요?
-몇 달 동안 한 번도 집을 떠나보지 못했어요. 알잖아요, 불가능하다는 거. 하루씩 운전 교대하면 우리 가능하잖아요. 어려울까요?
-아뇨, 괜찮아요.
-차 가지고 낼 데리러 갈게요. 짐만 미리 챙겨 놓으세요. 이페……?
-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 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닐까, 이페는 생각했다. 그녀의 존재를 알고 난 후 이페의 외로움의 크기는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로니카는 운전하고 정우는 옆에 앉아 있었다. 차는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평일이라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해변. 신발을 손에 들고 로니카와 정우는 맨발로 나란히 걷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엄마와 아들 또는 고모와 조카 사이의 그들. 로니카가 정우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정우가 로니카를 올려다보곤 다시 정면을 보며 걸었다.
사람들은 어두워진 해변 여기저기서 폭죽놀이를 하며 놀았다. 쉬익 소리를 내며 밤하늘로 치솟다가 순간을 태우고 사라지는 불꽃들.
로니카와 정우는 모래밭에 엉덩이를 붙인 채 다리를 뻗고 앉아 불꽃놀이를 지켜보았다. 청춘 남녀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이층 베란다에서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정우. 해변에서 놀던 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부드러운 파도 소리만이 들려왔다.
“뭐해요?”
정우가 뒤를 돌아보니 샤워를 마친 로니카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다가와 있었다.
“그냥요.”
“여행 온 거 후회해요?”
“아뇨. 잘 한 것 같아요.”
“근데 왜 필명을 이페라고 지었나요?”
“라이프에서 L을 빼고 발음 나는 대로 지은 거에요. 러브가 없는 라이프, life without love 라는 뜻이죠.”
“왜 그렇게 슬픈 이름을?”
“여자 친구가 떠났거든요. 밤을 함께 보낼 수 없는 남자 친구를 좋아할 여자는 없겠죠. 이해해요.”
“……”
“당신은 왜 로니카인가요?”
“베로니카에서 베를 뺐죠.”
“성녀 베로니카?”
“그래요.”
“세례명인가요? 베는 왜 뺐나요?”
“별 이유는 없어요. 그냥 성스런 삶을 살 자신이 없어서요.”
“그 생각, 해봤어요?”
“무슨?”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산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로니카가 시선을 정면으로 바꾸고 질문의 의미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도 나이 들어갈까?......”
“진희도 언젠가는 나로 받아 들여질까?......”
“어쩌면 10년쯤 후에는 이페가 아닌 정우의 삶을 더 사랑하게 되지는 않을까?......”
“맥주 한 잔 할 타이밍이네요. 당신한테는 미안하지만 나 한 잔 해야겠어요. 금방 갔다 올게요.”
로니카가 수건을 집어 던지고 지갑을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식탁에 맥주 몇 캔이 구겨진 채 쓰러져 있고 로니카는 적당히 취기가 올라온 모습이었다.
“많이 마셨어요. 그만 마셔요.”
“그래 봐야 맥준데요 뭐.”
로니카가 맥주를 또 마시려 하자 정우가 가로막았다.
“그럼 혼자만 마시지 말고 같이 마십시다.”
정우가 로니카의 맥주를 가로채 마셨다.
“금방 뻗어버릴 거면서……”
“아, 시원한데 쓰네요 역시. 이페가 마시는 맥주 맛이 안 나요. 젠장.”
“거 봐요. 괜히 몸 힘들게.”
“미안해요……”
정우가 하품을 길게 하면서 금방 꾸벅꾸벅 졸더니 식탁 위에 엎드렸다. 로니카가 일어나 정우를 안아 들고 침대에 뉘였다.
‘잘 자 정우야. 잘 자요, 이페.”
로니카가 정우의 이마에 살포시 입맞춤 했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우는 소리가 들렸다. 경쾌한 파도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개 짖는 소리까지. 햇살이 창문을 뚫고 실내에 길게 침투해 있었다.
자명종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저것 좀 꺼봐요, 아이 시끄러워.”
로니카가 잠결에 소리쳤다.
눈을 번쩍 뜨는 이페. 동시에 눈이 떠진 로니카.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자명종은 계속 울어댔다.
“미안한데요. 지금 좀 움직이기 그러니……”
이페가 이불을 움켜쥐고 있는 사이에 로니카가 재빨리 이불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휴대폰을 만져 소리를 껐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31일이네요.”
“그, 그래요?”
“네.”
“혹시…… 알면서 여행 오자고 한 거?”
로니카가 고개를 휙 돌려 째려보았다.
“흠흠…… 미안한데 나 옷 좀 줄래요?”
이페가 헛기침을 하며 부탁하자 로니카가 이페의 가방을 들어 침대에 휙 던졌다. 가방에 얼굴을 맞은 이페, 살짝 웃는 로니카.
동해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에는 솜털 구름이 느린 바람을 타고 굴러다녔다. 이페와 로니카는 선글라스를 끼고 맨발로 해변을 거닐었다.
노을이 지는 해변 위로 하늘이 붉게 타고 있었다. 해변에 기어 올라온 파도에 발을 적시며 거닐던 두 사람은 서로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키스. 입 맞추는 두 사람의 주위에서 노닐던 갈매기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페는 운전하고 로니카는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로니카는 진희가 되었다. 차는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