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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Mar 24. 2022

일상의 논어 <팔일八佾8>-회사후소繪事後素


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자하문왈 교소천혜 미목반혜 소이위현혜 하위야 자왈 회사후소 왈 예후호 자왈 기여자상야 시가여언시이의


-자하가 물었다. "'어여쁜 미소여 아름다운 눈동자여 흰 비단이 눈부시구나'라는 것은 어떤 뜻으로 한 말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라는 것이다." 자하가 말했다. "예는 나중이라는 것이군요?" 공자가 말했다. "나를 일으키는 사람은 상이로다. 이제부터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      



자하는 <<시경>>의 한 대목을 인용하여 그것의 본의를 묻고 있습니다. 


'소이위현혜'를 직역하면 '흰 바탕으로서 현란絢爛하게 되었네'의 뜻이니 위와 같이 시적 느낌을 살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하얀 도화지에 어여쁜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얼굴을 그린 것이지요. 


"흰 도화지가 있어야 얼굴을 그리고 그 안에 이목구비도 담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공자는 말하는 셈입니다. 이때 머리 좋은 자하가 스승을 일깨우는 한마디를 건네지요. <위정> 7편에서 공자가 '문장과 학문으로는 자유와 자하가 있었다'라고 언급한 바 있는 그 자하입니다.  


자하는 단박에 이해합니다. 흰 비단은 사람의 본바탕이요, 비단에 그려진 미소와 눈동자는 그 바탕 위에서 길러지는 예와 같다는 것을 말입니다. 맑고 순수한 근본이 없는 예란 꾸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국민에게 청와대를 돌려 주고,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집무실을 이전하며, 국민의 편의를 위해 혼잡한 출근 시간대를 피하고, 집무실에 간이침대를 들여놓겠다는 식의 그럴듯한 말이 전부 헛소리인 이유는 그 말들의 아래가 하얗지 않기 때문입니다. 담백하게 내보이지 못하는 부끄러운 이유가 어두컴컴한 마음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상商은 자하의 이름입니다. '시가여언시이의', 공자는 <학이> 15편에서 자공에게 한 말을 자유에게도 하고 있습니다. 함께 시를 논할 정도가 되려면 지식만으로는 안 되지요. 사물과 사람, 그리고 현상을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의 통찰력을 갖춰야 합니다. 시를 쓰려면 언어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시어詩語란 바위산을 깎아 옥을 빚는 것과도 같지요. 바위산 만큼의 생각과 말을 쪼아 버리고 또 버릴 줄 알아야 하고 남은 생각과 말의 정수를 놓치지 않고 담은 글을 창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를 읽는 것도 시를 쓰는 것도 모두 지혜의 영역인 것이지요.  


리더의 언어에서는 그의 사상이 배어 나오기 마련입니다. 달변과 눌변이라는 외형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시도 때도 없이 내뱉은 악취 나는 썩은 말들이 고여 연못을 이루고 연못 밖으로 넘칠 정도가 되었어도 기꺼이 그를 리더의 자리에 올려 놓은 국민들이 자신만의 향기로운 나날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입니다. 태도와 언어로도 그 사람의 본심을 읽지 못한 어리석음이나 알면서도 외면한 탐욕의 대가는 공동체와 개인 모두의 고통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진실은 감춰지고 분열과 갈등은 격화될 것입니다. 거짓과 혼란 속에서 이익은 은밀하게 거래되겠지요. 예가 앞으로 나오는(禮先) 위선의 시대가 탄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새봄의 마음이 늦가을처럼 을씨년스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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