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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Apr 12. 2022

일상의 논어 <팔일八佾17>-고삭희양告朔餼羊


子貢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자공욕거고삭지희양 자왈 사야 이애기양 아애기례


-자공이 고삭 때 희생양을 바치는 풍습을 없앴으면 하자 공자가 말했다. "사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는구나. 나는 그 예를 아낀다."



'고삭'을 직역하면 '초하루를 알리다'는 뜻입니다. 주나라 시절, 매년 섣달마다 천자의 사신이 제후국을 방문하여 새해의 정월 초하루 시점을 고지하고 책력을 전했던 제도에서 유래합니다. 제후들은 책력을 종묘에 보관한 후 매월 초하루에 종묘에서 양을 제물 삼아 제사 지냈다고 합니다. '고삭지희양'은 바로 이 양을 가리키지요.       


사회가 혼란해지고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면 제례 의식은 점차 퇴색되기 마련입니다. 아무래도 우선 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이지요. 사회가 급변하여 적응하기 어렵고 먹고 사는 일이 녹록지 않을 때 시간과 비용을 잡아먹는 가정의 예법이란 개인에게 번거롭게 여겨지게 됩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춘추시대의 노나라 왕실은 삼환에게 실권을 내어 준 채 겨우 명목만 유지하고 있었지요. 선왕들에게 제사 지내며 한 해의 풍년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했을 '고삭희양' 본래의 취지는 사라진 채 형식적으로 양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만 겨우 남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를 딱하게 본 자공이 한마디 합니다. "고삭희양을 없애는 편이 낫겠습니다" 정도로 했겠지요.    


공자가 자공의 뜻을 '애양'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마음은 '애례'에 있다고 말합니다. 현실에도 밝은 지혜로운 자공의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할 만합니다. 공자의 경제적 후원자 역할을 담당했던 그가 행사에 제물로 쓰이는 양이 아깝다는 생각에 저런 말을 했을 리는 없으니까요. '정신은 사라지고 형식만 겨우 남은 저런 행사 따위 다 무슨 소용인가?', 자공의 말은 이런 탄식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자를 제자의 생각을 왜곡하는 어설픈 스승 정도로 봐서는 안 되겠지요. 자공의 마음을 읽은 공자는 짐짓 농담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양 값이 아깝냐 이 녀석아? 자공아, 그래도 아예 없어지는 것보다는 형식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와 같은 뉘앙스인 것이지요. 


형식이라도 남지 않으면 그 안에 담겨 있던 정신도 결국 흔적없이 사라지는 법입니다. 현재의 노년 세대가 떠나고 나면 명절은 유명무실하게 되겠지요. 그렇다고 명절을 아예 없애는 것은 고향의 부모를 향해 모여들던 자식들의 마음과 자식들을 기다리던 부모의 마음, 그리고 두 마음을 이어 주던 가족애까지 우리의 기억에서 증발 시킬 뿐입니다. 


자공과 공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합니다. "예법과 그것에 따른 의식이 언뜻 불필요해 보이지만 그것은 정신을 담는 그릇과 같아서 그릇이 깨지면 정신도 남지 않는다. 정신이 무너지면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바로 서기 어렵다." 


몹시도 추운 겨울날 법당의 목불木佛을 스스럼없이 쪼개 불을 지폈던 단하 스님의 단단한 정신 그릇에 비해 초석에 앉았다며 불교 문화재에 대한 천박한 인식, 불자들에게 큰 상처 운운한 조계종 승려들의 그것은 너무도 작고 초라하지요. 묵념 사이렌이 울리는데도 이동을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던 무리의 정신의 보잘것없음은 바로 그 걸음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개념 없는 자들은 본래 언행도 엉망인 법입니다. 공자가 예라는 형식을 중요시한 이유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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