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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잉고잉 박리라 Oct 03. 2023

자전거는 서툴지만 업힐은 내가 제일 잘 나가

나는 러닝을, 내편은 라이딩을 즐긴다. 물론 나보다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 내편보다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꾸준히 즐기며 달려왔으니 난 러너, 넌 라이더라고 해도 괜찮겠지. 그런 우리 부부의 버켓 리스트 중 하나는 자전거로 제주 환상종주 코스 돌아보기였다. 라이딩의 관점에서 보면 나보다는 남편의 버켓 리스트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여행을 좋아하는 내게도 환상종주는 꼭 맞는 버켓 리스트라 할 수 있었다. 제주환상종주를 한다는 건 자전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제주도 한 바퀴를 도는 것인 만큼 자연경관이 수려해 세계적 관광지로 자리 잡은 제주도의 풍경을 속속들이 즐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어느 날 산책 중 남편이 내게 물었다. 

“제주환상종주는 언제 갈 거야?”

그리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음, 말 나온 김에 이번 가을 어때?”


그렇게 우리의 제주도 자전거 여행 준비가 시작되었다. 자전거는 빌려 타기로 했고 숙소는 대략적으로만 알아 두고 예약은 따로 하지 않았다. 하루 동안 얼마나 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사실 사전에 준비할 것은 많지 않았다. 항공권 구매와 종주 길 근처 저렴한 숙소 몇 군데를 알아보는 정도.




종주 첫날, 우리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해 둔 자전거를 빌려 곧바로 라이딩에 돌입했다. 오후부터 타기 시작했지만, 가장 체력적 부담이 없는 첫날이니 용두암에서 협재해수욕장 정도까지 약 40킬로미터 정도만 타보기로 남편과 개략적인 계획을 세웠다. 자전거는 어릴 적부터 곧잘 탔던 것이기도 했고 몇 해전 낙동강 하류 쪽 종주길을 자전거로 하루 종일 달려본 경험이 있었기에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남편이 앞에 서서 길을 잡고 내가 뒤따라 가는 방식으로 자전거를 탔는데 준비를 좀 해 두었어야 했던 걸까. 자꾸만 남편과의 거리가 벌어졌다. 열심히 다리를 움직여 발을 굴려보았지만 간신히 거리가 가까워졌다 싶어 마음을 놓으면 곧 남편과의 거리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따라가기가 바빠 제대로 풍경을 감상할 수 없었음은 물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마음이 자꾸 급해져 왔다. (눈물) 


하지만 둘째 날, 업힐(오르막)로 유명한 송악산 코스에 돌입하자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협재해수욕장을 보며 스타벅스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고 우리는 두 번째 라이딩을 시작했다. 역시 제주도. 잠깐 멈춰서는 곳마다 모두 달력에 그려진 예쁜 그림처럼 바다와 하늘과 갈대들로 풍경 맛집이 지천으로 펼쳐져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는구나 싶은 순간도 잠시, 계속해서 잔잔한 오르막이 반복되었다.


오르막이 계속 나왔으니 오후엔 내리막이 나오겠구나 하는 마음도 잠시, 하루종일 끝도 없는 오르막이 펼쳐지며 눈앞이 노래질 만큼 힘들었다. 뭐, 달릴 때도 늘 힘든걸. 허벅지는 터질 듯 아파왔지만 오래 달리기를 할 때를 떠올리며 호흡 가다듬고 일정하게 숨을 내쉬며 그 박자에 맞추어 단조롭게 페달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부서질 것만 같던 마음에 용기가 차오르고 다리와 발이 호흡에 맞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앞서 가던 남편을 제치고 전문적으로 자전거를 타시는 듯 복장을 갖춰 입은 몇몇 남자분들의 그룹도 제치고 선두에 올라버렸다. 기분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여성인 내게 선두 자리를 빼앗기자 그분들은 더 열심히 페달을 굴려보려 애를 쓰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꼭대기 즈음 왔다 싶자, 멈추어서 호흡을 고르고 있으니 내가 지나쳐 온 아저씨들과 저 멀리서 열심히 페달을 굴리며 올라오는 남편이 보였다. 와우, 자전거가 익숙하지 않아 평지에서는 헤매었지만 오르막길을 이리도 잘 오르는 스스로가 너무도 대견스러워 어깨가 절로 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여태 달리며 다져온 나의 탄탄한 다리 근육은 결코 나를 배신하는 법이 없구나.


그 뒤로 셋째 날도, 마지막 날도 상황은 비슷했다. 평지나 내리막에서는 남편이 앞서 달리고 오르막이 오면 내가 남편을 앞지르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나중에 남편이 우리의 오묘한 거리 차이가 무언가 이상하다며 쉬면서 내 자전거를 살펴보고는 혹시 기어 변속 기능을 아예 사용하지 않은 거냐고 물었다. 따라가기 바빠 기어 변속 기능이 있는 지도 몰랐다고 하니 남편은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나는 처음 대여할 때 놓여있던 기어 5단을 계속해서 사용했고 그래서 오르막에서는 기어 1-2단을 놓고 달린 남편을 가볍게 제칠 수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끝없이 펼쳐진 오르막을 기어 5단으로 내리 오르는 날 두고 이제는 마누라에게 다리 근육으로도 져 버리고야 말았다며 자존심이 상해했지만 그런 남편을 보며 나는 누구보다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무변 속을 유지했던 나의 라이딩은 무식하고 용감했지만 한번 더 달리기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함께 달리러 나가자며 그렇게 졸라도 달리기는 재미가 없다며 한 번을 함께 달리러 나가 주지 않던 남편은 나의 라이딩을 보고 이제부턴 자신도 조금씩 달려봐야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오예!


기어 변속도 자연스러워지고 속도도 익숙해져서 내리막길도 신나게 탈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무렵, 그러니까 중간중간 엉덩이 들기, 내리막길에서 잠시 손 털기 등의 스킬을 조금씩 몸에 익히고 안장통 역시 견딜 만해질 무렵이 되니 벌써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날 코스는 성산일출봉에서 김녕해수욕장을 거쳐 함덕해수욕장까지 들렀다 다시 용두암까지 달리는 것이었는데 달리며 바라보는 모든 풍경이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거의 없는 평지인 데다 백사장과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구멍 뚫린 깜장 돌, 에메랄드빛 바다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으니, 제주 종주길의 이름에 ‘환상’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것이 너무도 깔맞춤이었다. 어딜 가나 뷰를 밝히는 나에게는 정말 천국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지경




많이 힘들기도 했으나 즐겁고 행복했던 우리의 제주환상종주는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내게 이번 제주 자전거 여행은 공항에 내려서부터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기까지 모든 순간이 향기로운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허름한 여관방에서 자야 했고 하루 종일 달리느라 밤만 되면 근육통에 시달려야 했으며 다음날 가벼운 라이딩을 위해 온종일 땀에 절은 옷을 빨아 널어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견뎌야 했음에도 말이다. 멈춰 서는 곳이 모두 특별한 장소가 되는 설렘 가득한 그런 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 아름다운 제주와 그 아름다운 제주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체력을 만들어 준 나의 달리기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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