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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잉고잉 박리라 Apr 19. 2023

(D+160) 중환자실의 전원압박

엄마, 나 정말 길을 제대로 잃은 것 같아.

중환자실 교수님이 이제는 정말 일반 병실로 가든 다른 병원으로 가든 나가야 한다는데 신경과랑 감염내과는 엄마를 받아줄 수 없다고 하고 재활의학과는 받아준다고는 했는데 VRE병실이 언제 날지 알 수가 없데.

중환자실 교수님이 엄마 살뜰히 봐주시고 마음 많이 써주셔서 옆에 환자가 세네 번이나 바뀔 때까지 여기서 머물렀잖아. 교수님이 이제는 자기 사정도 좀 봐달래. 처음에 들어왔을 땐 엄마가 가장 위중했었는데 이제는 여기 중환자실에서 엄마가 제일 상큼이가 되었으니까. 의식만 좀 돌아오면 좋겠는데 말이야.

오늘 보니까 엄마 옆자리와 대각선 자리는 환자가 또 바뀌었더라.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대각선 자리는 엄마 처음 들어왔을 때 바로 옆에 계셨던 분인 것 같았어. 요양병원에 가셨던 건지 아니면 일반병실에 계셨던 건진 잘 모르겠지만 다시 안 좋아지셨나 봐.


교수님도 중환자실 입원기간을 자기 마음대로 늘려줄 수는 없데. 본인도 이제는 압박이 심하시다고 하니까. 그래서 조금만 더 중환자실에 있게 해달라고 VRE병실 자리가 날 때까지만 기다리면 안 되겠냐고 떼도 못쓰겠어. 나가라는 말이 있은지도 3주 차에 접어들었으니까...

어제는 엄마 보고 집에 와서는 서울 경기권 종합병원들을 중심으로 열심히 전화를 돌렸어. 여기처럼 상급종합병원이 안된다면 종합병원에서 조금이라도 더 치료를 받았으면 해서 말이야. 그런데 초진인 경우 대부분은 대리진료가 안된데. 정 진료를 보고 싶으면 환자를 데려오라는데 중환자실에서 의식도 없이 누워 산소를 5리터나 쓰고 있는 엄마를 어떻게 내가 어떻게 려가... 삼성서울병원 진료협력센터는 엄마가 옮길 병원을 알아봐 준다고 해놓고는 요양병원 목록만 잔뜩 보내주었어. 그 문자 보는데 얼마나 서럽던지. 나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엄청 아팠었잖아. 여기저기 큰 병원들 돌면서 입원해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간신히 친해진 옆 침대 아이가 자꾸 퇴원하는 바람에 늘 아쉬웠던 기억만 남아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엄마도 참 힘들었겠다 싶어.

뭐, 어쨌든 대리진료가 가능한 곳들은 전부 예약해 두었으니까 내일부터 두 군데씩 돌면서 싹싹 빌어볼 참이야. 근데 거기도 죄다 엄마를 받아줄 수 없다고 하거나 병실이 없다고 하면 나 정말 어떻게 하지? 너무 막막할 거 같아.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약속했었잖아. 엄마 절대로 요양원에는 안 보내겠다고. 요양병원은 요양원이랑 다르지만 한 글자 차이라 그런지 느낌이 너무 비슷해서 엄마 거기에 안 보내고 싶어. 듣기로는 돈이 비싸서 그렇지 괜찮은 요양병원도 꽤 있데서 몇 군데 전화를 돌려봤는데 죄다 엄마는 받아줄 수가 없데서 좀 울컥하더라.

엄마, 내게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담 좋겠어. 그냥 요즘은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해.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언제쯤으로 시간을 돌려보면 좋을까 하고. 엄마의 경련이 있던 그 새벽이 오기 전 응급실에 갔었더라면 어땠을까.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그날 묘하게 하루종일 엄마가 이상하긴 했었어. 제일 좋아하던 전국노래자랑도 마다하고 피곤해했던 거 하며, 소변 기저귀가 평소보다 작게 나왔던 거 하며 말이야.


만약 그때가 안된다면 기도협착 수술 전이라면 어떨까. 아니다.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안교수님 외래진료를 보던 날 바로 기관절개를 해 달라고 했담 어땠을까? 기관절개를 하면 말을 하지 못하게 되고 멀쩡해 보이는 목에 구멍을 내야 하니 그 당시의 나로선 미래를 다 알지 못하는 이상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런 선택을 하기는 힘들 거야, 그렇지? 사실, 엄마가 처음 쓰러졌던 그날보다 딱 이틀만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담 좋겠어. 그럼 어떻게 좀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니까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자꾸 옛날 일들이 생각나고 무수히 많은 후회가 올라와. 사실 엄마가 쓰러지기 전날 밤만 해도 설연휴에 함께 갈 보라카이 여행 계획을 짜느라고 여권 때문에 한참을 실랑이했잖아. 엄마 전화는 늘 귀찮아하면서 받았는데 그날만이라도 좀 제대로 통화할걸. 바쁘고 피곤하다고 너무 건성건성 사무적인 이야기만 한 게 이제와 너무 마음에 걸리는 거 있지.


미안해 엄마. 내가 자꾸 약해지면 안 되는데 말이야. 얼른 일어나야지.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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