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다시 한번 생존할 수 있었다. 두 번씩이나 찾아와 준 기적 덕분이었다. 하지만 일상으로의 복귀는 더 어려워 지고야 말았다. 첫 번째 기적 이후 남겨졌던 것들 보다 더 많은 흔적들이 엄마에게 남겨졌기 때문이다. 삼킴 장애, 사지마비가 훨씬 심해졌으며 의식은 깨어났지만 인지 장애도 심각한 수준이 되었다. 나와 아빠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콧줄을 다시 끼웠고 목관이 생겼다. CRE와 VRE라 불리는 다제내성균도 생겼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조금이라도 큰 병원에 엄마를 입원시키길 원했다. 너무 약해져 버린 엄마는 쉽게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이 불안해 보이기만 했다. 대리진료를 보고 병원협력센터에 전화도 걸어보고 하는 형태로 많은 품을 들였지만 옮겨갈 수 있는 병원을 찾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대부분의 병원은 초진환자와 균환자를 받지 않았다. 사정은 재활병원도 비슷했다.
어렵게 옮길 병원을 찾았지만 예전처럼 재활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엄마에게 숨어있는 다제내성균이 다른 환자들에게 전염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인실에 격리되어 제대로 재활을 받을 수조차 없으니 엄마의 장애는 쉬이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춰 있는 것만은 아니어서 시간이 흐르며 엄마의 신체기능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비교적 빠르게 회복되었던 왼쪽에 비해 미동조차 없던 오른쪽 손과 팔이 서서히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와 아빠를 알아보는지는 오리무중이지만 눈을 깜빡이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의사표시를 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 사이 복막염과 코로나19가 발생해 마음을 졸이던 시간들도 꽤 있었지만 엄마는 그 모든 고비를 무사히 넘겨주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나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체로도 일상을 살아가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비록 강제적이었지만. 여전히 엄마의 컨디션에 따라 내 기분 또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달리고, 그래서 여전히 자주 울며 그런 내 마음을 달래려 일기 같은 글을 쓰지만 그러면서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살고 또 그렇게 살면서 많이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