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수술과 긴 집중치료실 생활 끝에 엄마는 결국 생존할 수 있었다. 위험하다고 들었던 재출혈도 혈관연축도 없었다. 수두증 때문에 한 번 더 수술을 받았지만 경과는 좋다고 들었다. 그러나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누군가가 뒷목을 잡고 쓰러져 급히 병원에 옮겨지지만 위험한 순간을 넘기고는 금세 일상생활로 돌아가곤 하던데 현실은 드라마와는 달랐다.
인지장애, 삼킴 장애, 사지마비가 엄마에게 남겨졌다. 하루아침에 갓난아기가 된 듯 기저귀를 차고 침대에만 누워 콧줄로 넣어주는 유동식만 드실 수 있는 엄마를, 정상적인 대화가 안 되는 엄마를 보는 것이 처참한 기분이 들 때도 많았지만 그런 생각 따위에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그저 생존에 대한 감사함으로 살아 계시니 뭐든 해볼 수 있겠다고, 앞으로 내가 많이 노력하면 엄마도 차차 나아지실 거라고 나는 그렇게 희망회로를 돌렸다.
중환자실에 있던 기간을 포함해 총 3달 정도의 기간이 흐르자 대학병원 측은 이제 엄마를 재활전문병원으로 옮겨 본격적인 재활을 시작할 때라고 했다. 나는 남편과 시부모님의 배려로 회사생활을 잠시 중단하고 엄마를 돌보며 함께 재활병원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간병에 대한 두려움이 컸지만 아이 셋을 키워본 경험도 있겠다 일단 부딪혀 보고 잘 모르는 것은 배워서 하면 되겠지란 마음으로 용기를 내 보았다.
재활병원이라는 세상은 바깥세상의 기숙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그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환자와 보호자 혹은 간병인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배정받은 병실에서 먹고 자며 짜인 스케줄표 대로 재활 프로그램을 받으면 되는 거였는데 엄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그 모든 과정에 내 손이 필요했다. 콧줄로 엄마의 식사와 약을 챙겨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아 간호사 선생님의 시범 한 번과 약간의 설명 정도로도 충분히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저귀 갈기와 트랜스퍼(휠체어 태우고 내리기)는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유튜브를 보며 머리로는 방법을 충분히 이해했음에도 엄마의 기저귀 갈기 한 번에 온몸이 땀으로 젖곤 했고 트랜스퍼 한 번에 손목이 시큰거리고 팔이 달달 떨렸다.
하지만 나의 초기 간병 생활은 힘들지만은 않았다. 몸은 고되었어도 마음만큼은 환희에 찬 순간들이 참 많았다. 엄마의 장애 회복 속도가 꽤나 빨랐기 때문이다. 인지 장애는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았지만 삼킴 장애와 사지 마비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오전과 오후 재활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엄마와 재활실로 내려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특히 앉았다-일어서는 연습을 할 때에는 힘들었지만 엄마와 함께 몸을 움직이며 호흡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쉬는 시간마다 목에 힘을 키우기 위해 함께 애국가와 동료를 부를 때는 음악이 주는 긍정적 에너지를 충분히 누릴 수 있어 좋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손목부터 시작해 관절 여기저기에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하루를 마감할 즈음이면 오늘 하루도 알차고 활기차게 보내었다는 뿌듯함으로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참, 잠들기 전 손과 발, 세수까지 해서 엄마를 씻겨드리는 시간도 빼먹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지.
대상만 바뀌었을 뿐 엄마를 돌보는 과정은 내 아이를 돌보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삼킴 장애가 개선되어 연하 테스트를 통과하던 순간, 움직이지 않던 손과 발이 조금씩 움직여지는 과정을 지켜보던 모든 순간, 그래서 다음 단계의 재활 기구를 타게 되는 그 순간, 나는 누구보다 기뻤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환희라는 단어가 부족하다 싶을 만큼.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나고 말았다.
시작은 기침과 가래였다. 콧줄을 제거하고 기쁨에 차 있던 순간도 잠시, 이미 시작되어 버린 기침과 가래는 약을 써 보고 호흡기 치료를 해 보아도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급기야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왕왕 발생해 재활 프로그램을 받던 도중에 엄마를 다시 병실로 모시고 돌아와야 하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보아도 원인을 찾을 수가 없어 재활 병원에 머물면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과를 바꿔가며 사설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외진을 다녔다. 이비인후과, 호흡기내과, 내분비대사내과까지.
그 과정에서 엄마는 급격히 체중이 줄었다. 콧줄은 제거했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삼킴 장애 때문이었다. 밖에서도 간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엄마는 긴 식사 시간이 필요했는데 대학병원 외래진료를 찾아다니다 보니 한 두 끼니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병원으로 돌아와서라도 제대로 드실 수 있었다면 좀 나았을 까. 삼키는 게 힘든 엄마에게 기침과 가래까지 겹치자 엄마는 식사 자체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고집스러운 나의 식사 수발에 힘겹게 몇 숟갈을 드시곤 했으나, 하루 세 번 주어지는 그 시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조금 더 먹여보려는 나와 삼키기 어려워 입에 음식물을 물고 있는 엄마 사이의 불꽃 튀는 신경전, 그러니까 고통의 시간이었다.
기침과 가래, 호흡곤란으로 마음 졸이며 보낸 지 한 달여. 병명을 찾았다. 기관지 협착증.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님은 엄마의 기도가 조금씩 좁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단 두 가지, 목에 구멍을 뚫어 목 앞쪽 구멍을 통해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도록 하는 기관절개술과 기관지 내부에 실리콘 형태의 기도 스텐트를 넣어 기도를 확보하는 경직성 기관지 내시경 수술을 받는 것이었다. 선택은 보호자인 나의 몫. 그리고 나는 두 번째, 경직성 기관지 내시경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이 가능한 곳이 국내에 몇 되지 않는 바람에 진료 예약을 해 두어도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난관이 있었으나,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라고 전해 듣기도 했고 목소리를 잃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내 선택의 가장 큰 이유였다.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까. 여러 가지 상황과 우연이 겹쳐 우리는 예약날짜보다 여러 달을 당겨 진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입원과 수술이 결정되었으며, 수술 또한 몇 가지 검사가 끝난 뒤 바로 다음 날 진행되었다. 약 1시간가량의 매우 짧은 시간이었으나 전신마취 후 진행하는 수술이라는 점 때문에 걱정이 컸던 나와 달리 엄마는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